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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동질량...
    카테고리 없음 2024. 6. 23. 14:23

    대학 교재에는 계속 끊임없이 나오는데 정작 관련 연구자들은 쓰지 않는 개념이 종종 있다. 특수상대론의 '운동질량' 개념이 대표적인 예인데, Feynman 물리학 강의에도 쓰일 정도로 60년대에는 흔히 쓰는 것이었지만 지금 이론 물리 하는 사람 중에서 이걸 쓰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아마 큰 과장은 아닌 것 같다. 광속이라는 상수가 존재한다는 것은, 속력을 매개로 연결되는 다른 차원의 물리량들은 사실 같은 물리량이기 때문에 다른 차원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과 거리, 전기장과 자기장, 질량과 에너지 및 운동량 같은 것들이 대표적으로, 이것들을 '다른 차원'을 가지는 물리량으로 파악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잘 몰랐을 적 이야기이고, 상대론으로 세계관을 확장한다면 같은 차원을 가지는 물리량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자기 같은 경우는 특수상대론을 반영해서  전기장과  자기장을 같은 단위계로 보는 Gaussian 단위계를 쓰려는 시도가 상당히 많았다. 그러면 Maxwell 방정식이 좀 더 단순해지는데, vacuum permitticity나 permeability대신 이들의 조합인 광속만이 parameter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전자기 자체가 물리 이론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것과 연결되다 보니 아직까지 학부 과정에서 쓰일만큼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예를 들어 E. M. Purcell 선생이 Berkeley series 전자기책 쓰셨을 적에는 다 Gaussian unit으로 썼지만, 2000년대 신판이 나오면서 기존 단위계로 죄다 바뀌었다... 저자가 그렇게 신경을 많이 쓴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을 하게 되면 Planck 상수를 매개로 연결되는 물리량들은 같은 차원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길이 역수와 운동량, 시간 역수와 에너지 등의 관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action은 Planck 상수와 같은 차원을 가지기 때문에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action/Planck 상수는 모종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광속과 Palnck 상수를 1로 보는 natural unit을 이론물리에서는 보통 많이 쓰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신께서 하사하신 (God given unit)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운동질량은 그저 energy일 뿐이지, 따로 특별한 물리적인 해석을 가지는 뭔가가 아닌 것이다. 사실, 60년대까지 교과서에 흔히 나온 개념이라고 하지만 그전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가지고 운동질량 개념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장 Einstein 본인부터 초기 연구를 빼고는 운동 질량 개념을 쓰지도 않았고, 본인이 직접 운동질량 개념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학부 1학년 때 Taylor/Wheeler의 책으로 특수상대론을 접하면서 운동 질량 개념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보았을 때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기억이 난다. 여러 책에서 보여서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이 정작 쓰지도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의 첫 경험이 아니었나 싶다. 나중에 보니까 운동질량 개념의 오남용 역사에 관련된 논문도 있었다.

    Gary Oas, On the Abuse and Use of Relativistic Mass
    https://arxiv.org/abs/physics/0504110


     현대물리 수업 준비하면서 이 점이 다시 생각나게 되었는데, 다름 아니라 교과서인 A. Beiser 책도 운동질량 개념을 그냥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상대론이 처음 만들어질 무렵 특수상대론의 관점에서 중력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부분을 예로 들어보면 중력에 의한 blue/red shift를 이야기할 때에도 빛의 운동질량 개념이 나온다. 기하학이나 geodesic 개념을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metric 시간 성분으로부터 중력 potential을 읽어낸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직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너무 직관적인 것에만 의존하면 놓치는 것이 분명히 있고 무엇보다 그런 것 치고는 책 자체가 왜 그런지 설명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면이 있어서... -_- 


    이렇게 보면 더 이상 연구에 관여하지 않아 이해의 발전이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 사람이 예전 이야기를 답습해서 책에 적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연구하는 물리학자들도 막 다른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자신의 분야에 매몰되어 그 안에서만 계속 생각을 하게 되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예를 들어 내가 익숙지 않은 다른 한 편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익숙한 개념의 한계를 깨려고 하는지를 알기 힘들게 된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고립된 동네에 살면서 삶의 양식을 바꾸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 같이, 한때 내가 직접 해보고 권위 있는 지도 교수나 공동 연구자로부터 배운 것에서 모든 진리를 찾으려고 하고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리는 심리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분명히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도 익숙한 배경에 따라 생각의 바탕이 완전히 다른 경우도 있고, 그래서 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떨 때는 익숙한 생각을 깨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익숙지 않은 수학적 언어를 훈련하는데 시간이 훌렁 지나가 버릴 때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고생을 하더라도 처음부터 익숙한 사람을 넘어서는 생각을 하는 것은 힘들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안에서 머무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면도 있다. 복잡하고 익숙지 않은 것에 대한 모험을 하는 대신 쉽게 다룰 수 있어서 나에게 잘 와닿는 것만을 가지고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훨씬 편한 상황이고, 사실 그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긴 하다. 어차피 자연에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힌트를 줄 것이기도 해서 그게 꼭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사실 처음부터 완벽한 형태를 끄집어내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렇긴 하지만 항상 내가 알고 있는 너머에 내가 궁금한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언어를 알고 싶은 생각이 계속 존재한다. 그게 가능할지 자신은 없고 그 안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지는 더 자신이 없긴 하지만... 그냥 알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만족할 수도 있긴 한데, 남이 한 것을 일일이 받아들이기에는 그 양도 많고, 그게 오히려 제대로 된 이해와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번 제대로 이해의 틀을 잡으면 새로운 것이라도 자연스럽게 와닿기도 하고, 그 안에서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를 떠올리기 쉬운 면도 있어서.. 그런 면에서 내가 뭔가를 한다는 것이 그냥 이미 있는 것을 공부하기만 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게 좀 더 근사한 것이었으면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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