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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쓸 때 처음에는 이게 정말 논문 거리가 될까? 하고 마지못해 시작하더라도 하나씩 이야기를 맞춰나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덧붙여가다 보면 왠지 모르게 처음 생각보다는 괜찮게 진행되는 일이 꽤 있다. 첫인상만 보고 할지 말지를 쉽게 결정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할 수도 있지만, 논문으로 내놓았을 때 어떤 가치를 가지게 될지는 또 다른 문제라서, 정말 별 것 아닌데 내가 나를 속이고 있을 수도 있다.ㅋ 지금 쓰고 있는 논문이 딱 그 느낌인데... 이게 보기에 따라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지금도 '논문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면서 예전 논문들을 보다 보면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꽤 자주 든다. 예를 들어서, 어떤 계산을 누군가가 해서 논문으로 내놓았다고 하자. 그리고 좀 지나서 그 계산이 적용되는 모종의 물리 현상에 대해 아주 잘 이야기한 또 다른 논문이 있다고 하자. 이때 사람들이 인정하는 credit은 꼭 전자가 아닐 가능성이 꽤 많다. 특히 후자 논문을 쓴 사람이 유명한 사람일수록 더 그렇기는 한데, 보통은 이런 정치적인 문제와 '단순히 결과를 내놓는 것과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문제가 항상 독립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
지금 연구하는 것은 학생 때부터 훈련받은 것이 아니고 (그 전부터 준비는 했지만) 교수 거의 될 무렵에 늦게 뛰어든 것이다. 그런 처지다 보니, '자연의 진리를 탐구한다'는 멋져 보이는 일 뒤에도 여전히 위에 서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항상 (혹은 오히려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그리고 나도 단순히 그런 이면의 구경꾼이 아니라 당사자이기도 하다. 가끔 보면 내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좋게 이야기하면 도움이 되기도 하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실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과장되게 보이는 효과도 있기도 하다. 누구든지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이용하려고 하고 그것을 삶의 지혜라고 여기지만, 이게 정말 전체적으로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방향으로 가는 좋은 길인지는 상황에 따라 많이 다른 것 같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에 내가 쓸 수 있는 자원이 무한대라고 가정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얻어내려는 '합리적인 행동'이 장기적으로 볼 때 정말 좋은 것인지도 점점 확신하기 어려워진다.
살다 보면 다소 서운한 일들을 많이 겪기도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모든 것을 다 알아!하는 태도로 막 내 생각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논문을 보고 궁금한 것을 질문하거나 새로 나온 논문과 이전에 내가 쓴 논문의 유사성을 (최대한 공손하게 : 내 딴에는) 이야기하는 편지를 보내도 답이 없는 경우가 꽤 있는데, 한편으로 보면 내 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안 좋게 작용한 것일 수도 있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에게 서운하다기보다는 일종의 답답함이다. 뭐 언제 봤다고 생면 부지의 사람에게 살가운 답을 바라는 건 애당초 아닌지라.. 좀 더 정확히는 사람이 혼자서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에 비슷한 것에 관심 있는 사람과의 대화가 필요하고, 그래서 나름 길을 찾으려고 하는데 어째 계속 막다른 길만 만날 때의 느낌에 가까운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배우는 것은 서툴다는 것과 같은 뜻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과 이여기하는 것 자체가 아주 피곤하고 답답한 것도 사실이니까. 내 경우를 돌아보아도, 같이 일을 함으로써 뭔가를 배운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이 답답했다. 이 시점에서 뭔가 많이 깨달을 수 있다면 좀 더 멀리 갈 수 있을 텐데 그런 기회를 잘 잡지 못한 것 같아서. 각자 알고 있는 것 안에서 머물기만 하면 당장 논문 한두 편은 쓰게 될 수 있지만 그걸 가지고 좀 더 제대로 된 뭔가를 하기는 매우 힘들다. 특히 어떤 주제가 주어질 때 처음부터 오류도 없고 전체적인 판도에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은 일단 논문을 쓴 다음에 각자가 몰랐던 것을 새로 깨닫고 그것을 가지고 좀 더 이야기해서 업그레이드된 이야기를 새로 하는 것이겠지만, 많은 경우는 각자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씩 모아서 하나 쓰고 또 옮겨가서 다른 것을 아는 사람과 만나서 하나 쓰고... 그리고 끝이라서.. 단순 지식은 좀 늘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어떤 맥락에서 나온 일이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정하기에는 매우 모자란 일이 많다. 그 논문 주제가 이슈가 될 때에는 꽤 인용받으니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게 몇십 년 뒤에도 단순히 유행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물리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문으로 평가받는 것이 가능한지? 를 물어보면 글쎄... 그러다 보니 이게 혼자 하는 것만 못한 일도 꽤 생기고..
지금은 일단 누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인정하는 말든 그 전에 내 머릿속부터 채우고 보자.. 는 생각이라서 계속 책 보고 논문 보고 답이 오든 말든 궁금하면 물어보고 (교수라서 좋은 게 '읽씹' 당해도 내가 뭐 잘못했나?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것도 그냥 답을 내놓아라.. 는 식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떤가요?라고 나름 생각도 하고 그러고 있다. 연구 진행이라는 면에서는 이게 최선이기는 하다. 그러다가 괜찮은 인연 만나면 좋은 거고 없으면 없는 대로 계속 갈 수 있을 만큼 가고 싶은데... 이게 앞으로 얼마나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계속 불안한 느낌이 들긴 하는데 여기에 대한 답도 결국 내가 찾아야 하는 거겠지... 단적으로 '이거 연구해서 막 유명하거나 인정받는 것도 아닌데 여기에 시간을 계속 퍼붓는 행위'가 계속 압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사실 이건 연구 자체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데,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압력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