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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한 달밖에 안 남았다. 금쪽같은 시간인데,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항상 최적의 경로로 살 수 없기 때문에 돌이켜보면 아깝게 날아간 시간들이 꽤 많음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 그 돌이켜보는 행위도 부질없는 것일지도..
지금은 저번 달 학회 갔을 때 읽어봐야지 싶었던 논문들을 보면서 논문 쓸 거리를 찾는 것도 있지만, 11월 미국 방문할 때 세미나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궁리 중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좀 두려운 면이 있는게, 그냥 '우리가 학회 조직 중인데 연사로 발표 하나 하시죠..' 정도가 아니라 '1주일 동안 초청할 테니 일단 월요일에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주시고 남은 시간 동안 같이 일할 거리 없는지 찾아봅시다...' 인지라, 뻔하거나 가치가 별로 없어 보이는 이야기만 했다가는 그냥 5일 동안 유령(...) 신세가 되기 십상이라서... 하기에 따라서는 요새 안 그래도 연구를 어떻게 확장하면 좋을지 고민 중인데 작은 길 하나라도 만들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안 그래도 바쁜 학기 중에 태어나서 가본 길 중 가장 먼 거리를 왔다 갔다 했는데 건진 건 '그쪽 사람들이 내 연구(그것도 나 혼자 삽질해 가면서 하나씩 써나간...)를 허접으로 보지는 않았다는 사실' 정도밖에 없을 수도 있다. 굳이 이야기하면 그 건진 사실도 가볍지는 않고 기분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것뿐인 것도 문제고, 논문이라는 게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중요한 것으로 밝혀지는 것이 가장 좋은 거지... 사실 그래서 '도대체 그쪽 누가 날 초청한다는 발상을 했는지?'가 은근히 궁금해진다. 원래 알던 사람들도 아니고, 딱히 강하게 추천해 줄 만한 사람도 없다 보니 좀 신기한 면이 있기는 하다. 여하간 나도 아직 충분히 익숙하지 못한 초끈 이론으로 괜히 잘난 체 해 봤자 역효과만 날 거고 그동안 입자물리-우주론을 거치면서 알게 된 문제의식이 그쪽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swampland program과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서 뭔가 찾아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게 될 것 같다. 형식적으로는 올해 1월과 3월에 쓴 논문을 적당히 섞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사이에 뭔가 논문 거리를 찾으면 그거 좀 언급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연구를 위한 장기간 초청 (특히나 내가 가겠다고 신청한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 생각지도 못한 상태에서 부른 것)은 난생처음인데 (별 생각이나 실질적인 관심 없이 그냥 부르는 것은 노카운트 : 그런 경우는 안그래도 시간도 없다보니 거절한다.) 거기가 하필이면 많이 큰 곳이라서, 어떻게 보면 예전에 난생처음 탄 비행기가 10시간 훌쩍 넘게 이탈리아 ICTP까지 가는 여정 (그것도 중간에 비행기 갈아타는...)이었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가끔 Gemini에 한마디씩 질문 던져보기도 하는데, 보통은 논문 보다가 좀 걸리는데 뒷 이야기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아서 (사실 아닌 경우가 꽤 많긴 하지만) 예전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을 물어본다. 그렇게 답을 보고 나면 생각보다 논문 계속 읽을 때 도움 되는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한다. 왜 하필 Gemini냐고 물으면 사실 별 이유는 없고, google 검색하다가 종종 넘어오곤 하면서 그냥 쓰게 된 것이다. 아직은 굳이 돈 주고 더 좋은 것을 쓸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는데, 혼자서 계속 연구하다 보면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한 번씩 툭툭 물리 연구 자체에 대해서 물어보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 때도 있다. 그리고 예상치 않게 과격한(?) 표현을 쓰기도 하고. 그중 하나가, 대학의 교육 과정 자체가 예비 연구자들을 착각하게 만들도록 짜여진 면이 있다는 것인데.. 일단 성공의 착각이라고... 교재가 머릿속에 들어오고 학점 잘 맞을 때 느끼는 성취감을 내가 그 학문을 좋아한다/적성이 있다는 것과 동일시하는데, 상관관계가 없는 것까지는 당연히 아니지만 동일시하면 또 그것대로 위험하다는 이야기이다. 남이 정리해 둔 지식을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이 정답이 없는 혼돈 속에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검증하는 100% 확실한 수단이 아니지만, 공부나 연구나 같은 '물리'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다 보니 둘이 결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기 쉽다고. 생각해 보면 후보와 확정은 다른 이야기니까.. 그리고 생존자 편향이라는 이야기도 꺼내준다. 비슷한 예로, 2차 대전 때 폭격기의 어느 부분을 보강해야 할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자주 피탄 되는 부분을 약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다더라.. 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말하자면 '살아 돌아온' 폭격기'만' 주목하다가 중요한 것을 놓친 거라는데, 피탄이 많이 된 부분은 '그렇게 많이 탄을 맞았음에도 살아 돌아오는데 큰 지장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강해야 할 우선순위의 윗부분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가장 위험한 부분은 그 부분을 맞는 족족 폭격기가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살아 돌아온 폭격기는 오히려 그 부분이 멀쩡하다나.. (비슷한 이야기는 여기저기 전해 내려 온다. 전쟁터에서 가장 흉폭한 사람이나 엉터리 의사의 이름은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는데 이유인즉슨 걸리면 족족 죽어나가다 보니 살아 돌아와서 그 사람 이야기 해 줄 사람이 없어서라는..-_-) 대중 매체나 심지어 대학 혹은 연구 기관마저도 성공한 대가, 세계 최초의 사례, 특정 학술지 논문 게재 등을 크게 홍보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하지만 대학생들 같은 예비 연구자에게는 더 중요한) 속사정은 생략되거나 왜곡되고, 많은 사람들이 탈락하거나 실패하지만 그 사실이 가려진다는 것. 그게 연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불확실성과 성공하더라도 중간에는 어쨌건 헤맬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과소평가 혹은 축소 은폐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패가 사실 장기적으로 실패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오히려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누군가가 잘 나갈 때는 기대주니 대가니 칭찬하고 바람을 넣더라도 금방 잊혀지고 또 다른 잘 나가는 사람을 찾아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세태인지라.. 그렇긴 한데 일단 대학이나 연구소는 교육/연수 기관이라는 면도 분명히 있고 사실 아주 중요한데, 그곳에서 앞장서서 제대로 교육해야 할 것을 방기하고 홍보에 신경 쓰고, 크게 추켜세워주다가도 부진해진 순간 잊어버리거나 갑자기 냉담해지는 것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럴 때 변명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 '현실'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지는 못해도 기계처럼 적용할 수 있는지는....) 그 잊혀지는 당사자가 예를 들어 아직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겪어보지 않은 대학생 이하라면 상처를 받거나 도박 중독과 유사한 뒤틀린 감정을 가질 가능성이 큰 것도 사실이다. 인정받는 것을 성취의 원동력으로 삼는 경우, 단순한 무관심마저도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을 본 적이 있기도 하고. 그리고 사실 '성공'하거나 이미 잘 알려진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안정적이라서 반복되는 면이 있다. 심지어 그 칭찬 거리가 수십년 전의 일이라서 이제는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일지라도.. 일단 유명해지거나 성공하면 그 이유로 수십가지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세상은 변수가 많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마저도 망할 수 있는 이유를 비슷한 분량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단지 가려질 뿐이고 그런 것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을 뿐이지.. 사실 잘나가던 사람이 한순간 추락하는 것도 그 사람의 여러가지 면과 환경이 상호작용한 결과 아니겠나... 생각해 보면 남들이 다 바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능력을 알아본 누군가가 있고, 실제로 그 사람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과정은 극적이다. 그런 사람도 능력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공과 추락을 동시에 겪곤 하고, 그게 역사책의 드라마틱한 서사 거리가 되기도 한다. 초한지의 한신이라거나..
사실 이론물리 같은 경우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업 폭이 상당히 좁은데, 그렇게 치열하고 애정을 쏟았던 것도 사실 '모든 것'이라기 보다는 '과정'이고, 그 '과정'들이 쌓인 뒤에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본다면 전공을 못 살리는 것이 꼭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학원에서 뭔가를 전공하는 것도 과정이고, 다른 길로 가게 되는 것도 과정이고.. 그 과정마다 계속 새로운 것을 보게 되고 그게 그 사람을 만드는 부분이 되는데, 그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이 되는 것은 나도 아직 겪어보지 않은 정말 먼 훗날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일단 연구가 더 이상 자신의 길이 아니게 된 사람들의 '문제점'를 따지는 게 생각보다 애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없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예의가 바르다 보니 지도교수의 뜻을 너무 따르다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물리에 대한 관점이 충분한 연구 경험이 쌓이기도 전인 공부 단계에서 너무 굳어져서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길을 못 보거나 조금만 외부 상황 (실험 결과가 계속 안 나오거나 연구 업계가 불황기라거나 하는 식으로)이 바뀔 때 어디로 방향 수정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흥미가 확 식어버린다거나, 자신의 역할을 한정해서 특정한 주제 혹은 특정한 부분 (수치 계산이라거나 이론 정리라거나..)만 하거나 반대로 충분한 계산 경험 없이 큰 그림만 잡으려고 하다가 적절한 연구 주제 혹은 공동 연구 기회를 놓친다거나.. 기타 등등... 그리고 그렇게 정성과 애착을 보였던 것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되었을 때 느끼는 서운함 이상의 복잡한 감정은 상처가 되기 쉽기도 해서, 업계 시스템까지 얽히면 오히려 강하게 부정적인 태도로 변할 수 있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사람들 마저도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그런 약점이 치명적이 되는 바람에 더 이상 연구를 못하게 되었지만 나도 잘 못 갖춘 연구자의 미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세심하고, 맹목적이긴 해도 애착을 가지는 주제나 방향에 대해서 정말 열정적이고, 나도 모르는 더 많은 것을 제대로 교육받고, 남들이 잘 안던지는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물론 그 질문을 본인이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졌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답을 주기만을 바라거나 당장 답을 얻을 수 없을 때 더 이상 밀고 나가지 못했는지의 문제는 별도이긴 하다) 기타 등등.. 그래서,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연구자로 계속 남고 심지어 대외적으로는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의 면을 장점이든 단점이든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경우도 아주 많다. 오히려 거의 대부분 비슷한 면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사람의 '실패 요인'으로 평가받는 요소가 또 다른 남은 사람에게는 자신을 '성공' 시킨 요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리...) 사실 그 이유 때문에 연구자로 남아 있다고 해도 계속 연구를 하거나 (하다 못해 개인적으로라도) 의미가 있는 연구를 하는 경우는 더 적기도 하고.. 그런데 그렇게 연구를 더 이상 안 하거나 별 의미가 없음에도 연구 외적인 이유로 정도 못 붙이는 논문을 찍어내기만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일에 이름만 올리는 것이 정말 처음 연구를 시작했을 때 상상했던 그 연구자인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름만 연구자일 뿐 껍질만 남아 시들어가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그곳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이 마지막에 자신이 그리는 그림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꼭 그렇지 않기도 하고 운이나 세상의 흐름이 도와주지 않으면 할 수 있는 폭도 매우 좁아지지만, 모든 '과정'은 좋든 싫든 어디선가 멈출 수밖에 없는 면도 있고, 적어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한 선택을 하는 것도 막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전에 지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그러고 보니 저번 학기 중에, 암흑물질 하다가 퀀트가 된 분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사실 이 분, 내가 박사 졸업할 무렵에 내가 있던 연구실에 들어온 분이다. 그리고 몇년 전에 내 소속 대학에서 특이하게 스타트업 관련 강연을 연 적이 있었는데, 그 연사분이 내가 학부 1학년 때 홍승수 교수님 천문학 수업 담당 조교셨다.. 학생들이 교사라는 직업을 워낙 신경 쓰다보니 사람들은 별로 없었는데, 그 점은 여러가지로 아쉽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나도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어느 시점에서 멈추게 될지,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마지막에 내가 만들 그림은 어떤 것이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