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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 동안 잠시 시간 여유가 생겼다가 이제 끝나게 되었다. 다시 정신 없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뒤돌아 보니 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왠지 많은 할 일들이 가만히 숨은 채로 쌓여있다가 시간 여유가 생길 때 한 번에 덮치는 느낌이라서, 어떨 때는 누가 내 삶을 모니터링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트루먼쇼?) 올해가 이런 느낌이 유독 강하게 든 한 해가 아닌가 싶은데...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 보니 기가 빨린 상태이다. 사실 여기 꽤 자주 (특히 요새) 도덕 교과서 같은 글이 올라오곤 하는데,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쓴 것이 아니라 (일단 내가 누굴 훈계할 사람이 못 되는 건 나도 잘 안다) 그걸 느낄 모종의 사건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을 구체적으로 적기는 좀 그렇기도 하고 (사실적시명예훼손이라거나.. -_-) 나도 잘못이 없지는 않은 경우가 있어서 누구 탓을 하는 것이 부적절하기에 결국 이런 교훈을 얻었다.. 는 식으로 적게 되는 것이다.
새상의 파도를 맞는데 익숙해졌다고 해서 그게 반갑거나 기쁘지는 않은 법인데, 대부분은 그러려니 해도 연구 관련된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면 신경이 많이 쓰이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올해는 하필 논문 출판 하는 과정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는 바람에 덩달아 연구 진행까지 지지부진해지면서 계속 마음 한구석이 묵직한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어떻게 논문들은 썼고, 출판도 시간이 흐르면서 굼뜨나마 (사실 이게 문제 이긴 한데..) 하나씩 정리되고는 있지만, 왠지 씁쓸한 기분이 많이 든다고 해야 할까... 어떤 역할을 맡을 때, 분명히 기대되는 책임이 있고, 맡지 않는다면 모를까 특히나 다들 돌아가면서 맡아서 어쩔 수 없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앉아 있는 자리라면, 그리고 그 자리가 상당한 영향력 혹은 신망을 받는 자리라면, 헌신의 의무가 있기 마련이다. 그 일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무관심하고 늦는다면 의무를 저버리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런 자리일수록 적당히 뭉게도 크게 손해를 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뭔가 나서려고 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꽤 많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거나, 아니면 품은 많이 드는데 정작 영향력 없는 사람의 작은 감사 이외에 얻는 것이 없다거나. 그리고 개입을 하더라도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어서 원망받기도 딱 좋다. 그럴 때 무감정하게 사무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오히려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일이 많다. 적어도 '사고'는 안치니까.. 그런데 그렇게 유지되는 집단은 설령 안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여도 역동적이지 않아서, 계속 이유 없이 눌리는 쪽이 점점 늘어나는 일이 흔하다. 그래서 암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세상은 시간이 흘러도 항상 같지 않고,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계속 도전을 받고 최소한 버텨내야 할 일이 많다. 그럴 때 숨은 암이 치명적인 작용을 할 수 있다. 예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계속 있어야 한다는 이유가 되지는 못하는데, 설령 공격하는 대상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악당이더라도, 그 사실 자체가 자신을 계속 지켜주지는 못한다. 항상 잘 흘러가는 것 같더라도 때로는 귀찮은 일에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그런 위험을 막기 위한 면도 있다.
시간이 달라지면 모든 것이 같지 않은 것은 사람도 똑같다. 예전에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진짜 똑똑한 것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그게 현재 그 사람이 앉아야 할 자리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미래에 누려야 할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여기에 기대되는 역할을 하는데 충실한지가 문제이다. 학계의 지위는 과거의 고생이나 똑똑하다는 평가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것이라고 기대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잊는 순간 자신이 과거에 가졌던 똑똑함이나 고생은 과거의 일일 뿐이고, 그걸 공유했던 사람들 사이의 추억에 그칠 뿐이라서, 현재 성장해 가는 사람들에게는 별 감흥이 없다. 연구만 해도, 종종 어떤 연구가 나올 때 '이 사람은 그거 모르는데?'라는 반응이 항상 좋지만은 않은 것이 그 때문이다. 어떨 때는 진짜 모르는데도 이름만 얹는 경우 (특히 여러 사람이 우르르 논문 쓸 때 종종 생긴다) 도 있어서 그 평가가 맞기도 한데, 또 어떨 때는 제대로 공부하고 그런 논문을 씀으로써 하나씩 알아가는 일도 있기 때문에 한두 일로 평가할 일이 아니라 연구의 맥락을 지켜볼 일이다. 만약 과거 어느 시점까지 본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평가하려 한다면, 오판할 가능성이 커진다. 가끔은 그게 여러 의미로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외부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정보의 업데이트에 상당히 둔감하다. 고대부터 그런 일은 꽤 많았으니까.. 한신이 동네 깡패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바보 같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정말 바보도 아니었고, 나중에 그 사실만으로 낮게 평가했던 사람들이 줄줄이 당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데 종리말은 반대 경우 아닌감...-_-)
사실,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연구 업계를 보더라도, 건전하지 않은 면들은 꽤 많다. 권위나 돈에 약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더 상황을 악화시키는 일은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그래서 연구와 관련된 일이 항상 공정하고 배려 넘치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나도 여기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의 선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건 자신이 맡은 일이 있을 때 그것에 최대한 충실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이건 사람의 인성과 꼭 같게 돌아가지도 않는다. 정의를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항상 친절하고 봉사하더라도,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연구와 교육에 소홀한다면 그건 무례하고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라고 평가받지만 연구를 제대로 해내고 가르치는 내용이 충실한 사람에 비해 물리학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후자가 받는 부정적인 평가는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성격이 정말 그래서일 수도 있지만, 본업 이외의 일에 더 비중을 두는 사람들이나 본업을 이용한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 대해 내리는 부당한 평가일 수도 있어서, 직접 겪어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삼가고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마음에도 없는 말도 하는데 몇 가지 사례만 가지고 평가하는 것도 그렇고. 이 바닥이 원래 사람들의 평가로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보니 그런 쪽은 더 조심해야겠지 싶다.
여하간 책임 있어야 할 사람의 무성의함과 굼뜸에 몇달 시달린 차라,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기도 하고, 또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어 좀 서글퍼지는 한 달.. 아니 열 달이었다. 이제는 별로 기대도 안되기는 한데, 적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제대로 잘 굴러갈 수 있으면 좋겠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게 좀 그렇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