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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은 선구안을 가지고 있다면 처음 연구 들어가기 직전 가졌던 생각이 잘 구현될 텐데, 나는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인지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중력과 관련된 어떤 물리량이 있고, 이게 concave 하다면, 이걸 entropy와 연결 지을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그 entropy스러운 무언가가 area law를 따르는지 확인하고 싶어 지는데, 이게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무언가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은 내가 아직 뭔가를 놓치고 있어서 사실 연결고리가 있는데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몇 가지 시도를 해 보다가 잘 안되면 일단 멈추고 다른 이야기를 보게 되는데, 그게 쌓이면서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것 같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결과를 얻었다면 더 좋을 텐데.. 싶은 것이다. 여하간 올해 여름은 그런 시도들이 연속적으로 잘 안 먹혀서 다소 불안했던 것 같다. 지금이라고 좀 더 나아진 것은 없지만.
생각이라는게 논문 한두 편 본다고 바로 생각나는 것도 아닌 것이, 논문 자체가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짜여진 틀이고,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도 별 설명 없이 하곤 하기 때문에 내가 뭔가 다른 (하지만 연결된) 어떤 생각을 따로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약간 콜럼버스의 달걀스러운 면이 있긴 한데, 나중에 여기에 이런 문제가 있고 그래서 이런 식으로 풀었습니다..라는 논문을 보면 그때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싶은 것이다. 신박한 논문이라는게 꼭 배경 지식이 아주 특별하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논문을 볼 때 계속 여러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런 생각을 논문을 이해해 가면서 동시에 한 방향으로 정리하는 것도 그다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읽기만 하고 새로운 논문을 본다는 것에 만족만 하는 것은 물리학자라는 직업에 맞는 일은 아닐 것이다.
관련된 연구는 정말 얼기설기 쓴 논문 하나밖에 없지만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island 이야기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black hole의 정보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전환점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주제이다. 다만 실제로 계산할 수 있는 것들이 AdS/CFT라는 틀 안에서 주로 이루어지다 보니 그러면 실제 black hole은? 혹은 de Sitter 같이 horizon을 가지지만 CFT dual이 애매한 다른 geometry는? 같은 문제들이 떠오르게 된다. 아무래도 실제 현상과 비교하는 쪽이 취향이기도 하고, 학생 때부터 그쪽으로 훈련받았기도 했기 때문인데, 그 와중에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문제를 눈치채지 못하는 일도 있는 것 같다. 어디에 쓸 것인가를 고민하다 보니 정작 내재되어 있는 문제를 눈치채지 못한 것일 것이다. 사실 AdS/CFT 관점에서 island를 이야기하는 것은 꽤 자연스럽다.. 는 느낌이 들었다. CFT의 한 영역이 가지는 entropy를 어떻게 계산할까?라는 문제에서 시작해서, 결국 이 entropy와 같은 양은 AdS와 같은 bulk geometry의 어떤 영역이 가지는 (entanglement wedge라고 부른다.. ) 일반적인 entropy, 즉 그 영역의 면적과 그 안의 excitation에 의한 entropy의 극값(의 최솟값)이라는 것이 기본적인 아이디어이다. 말하자면 boundary의 정보는 bulk에 어쨌건 담겨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entanglement wedge라는 영역이 꼭 boundary의 CFT와 딱 붙어있으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Bulk의 깊은+고립된 영역 중 일부도 포함할 수 있고 (그래서 이걸 island라고 부른다), 기술적으로 보면 path integral의 dominant 한 saddle point이기는 하지만, 물리적으로 보면 wormhole로 연결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black hole에 멀찍이 떨어진 radiation 역시 black hole horizon 안쪽의 island에 관련된 정보가 담겨있을 수 있고, 이게 black hole의 내부와 외부의 correlation을 가지기 때문에 black hole이 증발하더라도 entropy를 오히려 감소시키는 요인이 된다. 어떻게 보면 space-like 하게 떨어진 영역이라도 non-perturbative 하게 보면 독립적이지 않은, 중력의 특이한 성질 중 하나일 것이다. 보통 이걸 이야기할 때 radiation은 geometry와 상호작용하지 않도록, 중력이 없는 공간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중력이 있는 영역과 radiation은 있지만 중력이 없는 영역을 붙여놓는 것인데, 중력이 있는 영역 입장에서는 energy-momentum이 빠져나갈 공간이 따로 있는 셈이라서, energy-momentum conservation이 깨지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전자기에서 charge conservation이 gauge invariance를 반영하듯이, energy-momentum conservation는 diffeomorphism invariance와 관련이 있는지라, energy-momentum conservation가 깨진다는 것은 중력자가 양자역학적인 질량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단순히 island처럼 local 한 영역에 boundary의 정보가 담긴다는 것도 생각해 볼 이야기인데, 물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gauge invariant 한 (=diffeomorphism invariant 한) 양이라서, operator를 정의할 때 Wilson line이 붙게 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 같다. 그 결과 operator들이 non-local 하게 되어서, island에는 사실 내가 원하는 boundary 영역 밖의 정보도 섞여 있는 것 같다. 그러면 island가 boundary의 정보가 담겨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문제도 있는 듯하다. (나도 논문 몇 개 읽고 이야기하는 것이라 잘 표현이 안되어서 부정확한 정보가 섞여있을 것이다...-_-) 여하간 arXiv를 보고 있자면 요새 이쪽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중력이 없는 영역을 붙인다는 게 island를 이야기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논문도 있고... 나온 논문을 보고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은 좋은데, 뭔가 나도 할 이야기가 있다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 자체가 중력의 양자역학적인 이해라는 면에서 중요하기도 하고... 흥미가 생기는 문제이기도 해서.
지금 생각으로는 string compactification 특히 moduli stabilization과정에서 나오는 여러 교훈들, 예를 들어 swampland program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실제 우주나 black hole에 적용될 때, island 같은 주제에서 나오는 것과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지 꽤 궁금하다. 생각해 보면, 처음 swampland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cosmological horizon이 가지는 entropy와 연결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으니까.. 섭동 계산으로는 잡히지 않는 뭔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계속 범상치 않게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런 이론적인 논의들이 실제 우주론에 적용되는 것이 필연적인 방향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아직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을 만드는데 중요한 질문에는 만족할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 뭔가 잡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연구 시작한지 15년이 지나도 여전히 헤매는 것이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언젠가라도 나에게만 보이는 뭔가가 생기면 적어도 실패는 아니지 않을까 싶다. 훨씬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모든 것에 대해 완벽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그런 사람들도 헤맨다.. 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숙련된 연구자마저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는 것이 좀 신기했다)
사실, 이런 고민들이 가능한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 연구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인 면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학생을 가르쳐서 박사 후 연구원 (포닥) 과정까지 어떻게든 보내야 하는 입장이라면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아지기도 할 것이라서.. 어차피 누구 시키는 것보다 내가 직접 뜯어보는 것이 더 안심되기도 하고, 이해라는 측면에서 더 나아서 일단 열심히 차력쇼를 하고 있긴 한데, 시간이 지나니까 좀 힘이 들기는 하다. 조금 익숙해 지니까 처음에 이것저것 뭐든지 궁금해하던 시기를 벗어나면서+내 생각도 내가 스스로 거를 만큼 아는 게 생기다 보니 오히려 연구거리를 찾는데 좀 더 어려워진 면도 있고... 여하간 내 연구와 관련된 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과 별 인연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약간 그걸 간접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두어 달 전, 누군가가 편지로 potential collaboration 이야기를 하면서 내 조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보통은 이런 경우 포닥 자리를 찾아서 접촉하는 경우라서, '나는 연구비도 없고 누굴 어디 보낼 정도로 영향력 있는 추천서를 써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면 그쪽은 알아서 물러나준다. (편지에 Prof.라고 붙여주다가 그 답을 보고 Dr.로 바꾼 사람도 있었다..-_-ㅋ) 그런데 그쪽은 그런 건 아니라고 하고, 순수하게 연구 관련한 이야기라고 해서, 몇 번 의견 교환을 하게 되었다. 사실은 그 직전에도 누군가가 같이 연구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쪽은 구체적인 연구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CV를 보내고 자신의 관심사 이야기를 하는 쪽이라서 좀 더 구직 문의 같았지만, 어쨌건 그 사람도 포닥 구직은 아니라고 해서 좀 의아했던 일이 있었다. 두 경우 모두 의아하... 다기보다 신기할 수밖에 없는 게, 내가 일단 유명한 사람은 당연히 아니고, 그쪽도 이 바닥 돌아가는 것을 모른다기에는 나름 유명한 사람들과 얽혀서 같이 논문도 쓰고 한 사람들이라서, 어쩌다 나를 생각해 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확실히 특이한 경험이긴 하다. 어쨌건 그쪽에서 거의 계산을 했기 때문에 내 이름을 넣을 건 당연히 아니고, 그래도 최대한 아는 선에서 같이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내가 내 전공 가지고 포닥이나 학생 키우면 이런 느낌이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쪽도 논문 거의 써 간 것 같은데... 그래도 acknowledgement에 내 이름은 넣어주겠지..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