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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주 논문 작업이 다른 때와 좀 다르다 싶은 거 하나 고르라면 논문 쓰고 난 다음 계속 몸 상태가 영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하루 이틀 쉬면 정상 컨디션이 되는데 이번에는 계속 졸린데 잠은 늘어나지 않는 상태가 이어져서 몽롱함 비스무리한 상태로 거의 열흘 정도 지낸 것 같다. 논문 끝내서 올린 게 수요일이었고 그다음 목요일에 수업이 다섯 시간 있어서 그런 건가 싶긴 한데...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이 들거나 다른 해야 할 일이 생기기 전에 힘이 들만한 것은 최대한 해 두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새로운 개념을 공부한다거나 품이 많이 드는 계산을 많이 해본다거나.. 사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또 해야 할 것이 생겨서 그게 그거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조금만 더 머리가 좋았다면 좀 더 편해졌으려나...
사실 통상적으로 머리가 좋다고 할 때 드는 요소들, 그러니까 이해 속도가 빠르거나 임기응변이 뛰어나거나 하는 것은 내 재능이 아니라서, 모르긴 몰라도 같은 업종 사람들 중 내가 '머리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긴 한데 두 가지는 생각할만하다. 정말 그런 능력이 머리가 좋은 것을 결정하는 척도인지, 그리고 이론물리 같은 '머리 많이 쓰는' 직업은 그런 능력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인지. 일단 나는 둘 다 부정하고 싶기는 하다. 그리고 설령 그게 맞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은 상대적인지라, '똑똑한'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애매하지만 일단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으로 보면..) 사람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많다. 그러면 어느 정도 이상 똑똑해야 이론물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까...?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측정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똑똑한' 사람의 서열이 좋은 물리 연구를 하는 서열과 반드시 일치하는지도 많이 의심스럽다. 음의 상관관계까지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샤프한 1차 함수 직선이 그려질 것 같지도 않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그런 것 같다. 이 생각에 자기 방어적인 시각이 없다고도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 '똑똑한'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뭔가 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똑똑한'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 혹은 잘 놓치는 것을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 캐치를 하고 제대로 잘 해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말하자면 '똑똑하지 못한' 사람은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 자체가 '똑똑하지 못하다고' 이야기되는 사람이 실은 똑똑한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똑똑하다고 하는 것이 똑똑함을 이야기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닌 것 같은데, 좀 더 세련되게 다른 말을 써서 현명하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구분을 하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부질없는 것이 더 정답에 가까울 수 있다.
이론물리학자의 가치는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라서 주변에서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논문 한 편 쓰지 않은 사람의 이름이 남을 수는 없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하기에는 한계가 많다는 것이기도 하고, 논문 한편 쓰지 않은 사람은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논문 쓰는 능력 혹은 적절한 논문 주제를 판별하는 능력이 부족하기에 똑똑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연구라는 것은 많은 요소가 들어가기 때문에 딱 이래야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다고 단정짓기도 힘들고. 어떤 사람은 어느 한순간 중요한 일을 하고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더 이상 의미 있는 연구를 하지 않기도 한다. 그래도 그 일이 아주 중요하다면 누구나 그 사람을 기억할 것이다. 혹은 똑똑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내공을 쓰거나 한참 기다린 다음 어느 순간 반짝 찾아온 기회를 잘 잡아내서 괜찮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아주 다양한 형태의 연구가 있고 중요한 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개인이나 사회의 형태에 따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업적의 내용이 중요하다 이상의 다른 이야기, 예를 들어 이렇게 해야 좋은 연구를 한다.. 는 법칙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오만한 발상일 수 있다. 그렇긴 해도 반짝이는 재능에 대한 동경은 외부인뿐만 아니라 연구에 담그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라서, 너무 쉽게 사람을 평가하고 그것을 자신의 지혜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이 과한 사람은 항상 존재한다. 모를 때 보면 그런 사람이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나중에 보면 그게 그 사람의 능력을 묶어 버린 족쇄가 아니었을까 싶을 때가 있다. 사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으니 한계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결정적일 때 아쉬운 행동이나 생각을 하는 경우를 보면 이런 사람이 이런 바보 같은 일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쉽게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기보다 스스로를 더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창시자들이 보여준 철학자적인 면모 때문에 이론물리학자는 깊고 넓게 생각한다고 여기기 쉬운데,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특정 부분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다. 그 사람의 행동과 생각, 물리적인 연구는 이어져 있지만, 한쪽이 정당화된다고 해서 다른쪽이 모두 정당화되지는 않고. 그 사람 특유의 기질이 특정 업적으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이 그 사람이 생각한 방식 그대로 남지는 않고, 자연의 뭔가를 묘사하고 있는 이상 계속 재해석되고 나름대로의 줄거리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발견한 사람의 손을 쉽게 떠난다. 자연에 그 발견의 요소가 정말 있다면 그걸 발견한 사람과 완전히 다른 기질을 가진 사람이 다른 경로로 발견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그런 사례가 있고. 오랜 시간 동안 계속 같은 업계에 있고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기 때문에 오히려 바보같이 눈치채지 못하는 일 혹은 변명을 만들어서라도 애써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려는 불편한 진실 정도는 어느 곳이나 존재한다. 당연한 게 실은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이 연구 거리를 찾을 때 명심해야 할 중요한 것이지만, 연구 자체는 물론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지위나 사회적 관계에서까지 그런 원칙은 쉽게 무시된다. 그리고 고생을 덜하고 편해지고 싶은 본능까지 죽는 것은 아니기에 힘이 없을수록 쉽게 휘둘리고 힘이 있을수록 쉽게 무책임해지는 것은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분야를 평가절하하거나 자신도 아주 잘 아는 영역이라고 착각하는 오만함도 있고. 유연해야 할 것 같은데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맹목적인 면도 있고.. 이게 부정적이냐면... 맞긴 한데, 사실 이게 다른 게 아니라 사람 사는 모습인지라 특별한 어둠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억울한 면이 있다. 결국 사람 사는 곳이기에 욕심과 본능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일 텐데... 당사자가 되어서 그 속을 헤쳐나가는 입장에서 그닥 달갑지는 않지만, 사실 다른 길을 선택해도 비슷한 명암은 존재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사람 혹은 집단에 대한 과한 기대나 실망을 가지지 말고, 그 안에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게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부작용이 적은 자세일 수도 있다. 이것도 사람마다 다 생각과 능력이 다르니 무엇이 최선인지는 각자마다 다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