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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은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는가? 학생 시절 같이 연구했던 교수님은 model builder 유형에 속하던 분이셨고, S. Hawking과 L. Mlodinow가 쓴 Grand design ('위대한 설계'라는 제목으로 번역)에서 강조한 'model dependent realism'이라는 개념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셨다. 이런 주장이 어떤 면에서는 Heisenberg의 '부분과 전체'에서 인용한 Einstein의 주장, 즉 '사람이 무엇을 관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이다. 이론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만이 감각과 인상을 통하여 그 바닥에 깔려 있는 현상에 대한 결론을 내일 수 있다'는 것과 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론과 모형은 미묘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차이가 있긴 하다. 이론이 일종의 기준틀(framework)이라면, 모형은 그 이론을 통해 현상을 묘사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양자장론이라는 이론을 토대로 gauge group을 선택하고 입자들을 적당한 representation으로 나타내어 표준모형을 만들긴 하지만, 표준모형이 양자장론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자연의 묘사 방법은 아니다. 즉 양자장론을 배웠다고 표준모형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 드러난 사실들 (chirality라거나...)과 맞춰봐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런데 왜 하필 자연은 다양한 가능성 중에서 (적어도 TeV scale 이하에서는) 표준모형으로 묘사되는 방식으로 움직일까? 혹시 그 뒤에 뭔가 또 다른 자연의 원리와 관련된 새로운 기준틀이 암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이론물리로 돌아와서, 양자중력까지 확장된 기준틀이 있을 때, 현재 우주가 그 유일한 가능성인지는 꽤 어려운 (그리고 앞의 예에 비추어 보면 다소 회의적인) 질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초끈이론을 받아들일 때, 현재의 우주가 유일한 가능성은 아닌 것 같다. 심지어 4개의 차원이 특별히 커야 할 이유도 딱히 없어보인다. 이게 모든 이야기의 끝인지, 아니면 아직 모르는 양자중력의 어떤 원리가 작용해서 거시적으로는 4차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여하간 이론이 맞다면 관측적으로 관찰된 세상은 그 이론 안에서 굴러가야 하니까 초끈이론으로 현재 우주의 상태나 표준모형은 어떤 식으로든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초끈이론은 중력의 양자화와 다른 gauge 상호작용의 양자화가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제약이 있는 편인데, 이게 잘 돌아가면 왜 이 세상이 이렇게 생길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필연성이 확 늘어나지만, 어긋나게 되면 이론의 타당성마저 의심스럽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끈이론이 현실과 만나는 과정에서 compactification은 중요한 주제이다. 이 안에는 다양하고 깊은 대수기하학적인 혹은 대수위상수학적인 문제가 숨겨져 있다. 때로는 이게 상당히 깊이 들어가서, 선형대수나 미분기하학과는 좀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한다. 뭐랄까.. 추상적인 과정이 매우 강하게 들어가서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 보다 쉽지 않은 면이 있달까.. 예를 들어 category theory 이야기를 가끔 보게 된다. 집합 같은 개념을 'object'로 추상화/일반화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원소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ker나 coker 같은 이야기들이 mapping (morphism)의 언어도 재조직되어 나온다. 그래서 cohomology 이야기도 spectral sequanece로 확장된다. Sheaf라는 이름으로 정리된 '뭔가'가 있고, 그들 사이의 morphism이 있는데,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잘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현상론으로 훈련받은 업보(?) 일지도...) 논리를 따라갈 수는 있겠는데 마음에 새겨지지 않아서 잊어버리게 되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개념들을 물리에 연결 짓는다는 발상을 했는지가 신기하다는 느낌도 든다. 사실 sheaf를 D-brane이라고 생각하고 morphism을 D-brane 사이를 연결하는 open string의 excitation state라고 생각하면 보다 실감이 난다.
그것보다 좀 덜 이질적인 것은 (warped) Calabi-Yau manifold를 가지고 실제 compactification을 해 보면서 4차원에 어떤 구조가 나타날지를 생각해 보는 것일 것이다. 왜 4차원이라야 하는지라는 질문은 제껴두고, 일단 세상이 4차원이니 그걸 묘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충실히 하다 보면 어쩌면 4차원만이 가지는 특별한 뭔가를 찾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warped) Calabi-Yau manifold 냐면... 이건 물리적으로 보면 4차원에서 비교적 낮은 energy까지 N=1 supersymmetry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기대를 왜 했는지를 추적하면 표준모형이 가지는 chirality와 함께 gauge hierarchy problem이 나오고. 물론 지금까지 LHC에서 TeV scale new physics가 나타나지 않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 대폭 늘어나기는 했지만, 적어도 Higgs scale의 근원에 대해 뭔가 이야기해야 한다는 문제는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가치 있는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학적으로 보면, 이건 꽤 잘 정리된 대수기하학적인 문제이다. 때로는 역으로 수학적인 발상을 하는데 compatification에서 다루는 상황이 힌트가 되거나, 연구 방향에 대한 제안도 하는 것 같다. 상황은 그렇지만, 이게 정말 자연을 묘사하는 이론을 찾는 좋은 방향이라서 연구하다 보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영역인지?라는 문제는 내 입장에서 꽤 심각한 문제이다. 이미 나보다 수학에 능한 사람들이 계속 투입되면서 엄청난 산을 만들어 놓은 상황인데, 그 산을 한참 아래에서부터 올라가야 하는 입장에서 정말 이 산을 올라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분명히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연구 생활 끝날 때까지) 삽질과 초보적인 실수, 혹은 내 딴에는 뿌듯하지만 전문가들 입장에서는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그걸 감수하고도 덤빌 가치가 있는지? 그쪽에 호의적인 정도는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기에 남에게 물어봐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 관점과 지식을 토대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고, 크게 보면 내 연구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인지라 고민을 하게 된다. 항상 뭔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고, 내가 꽝을 고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이 사실 진실에 가까운 더 좋고 중요한 문제이고, 더 골 때리게도 내가 선택한 길보다 훨씬 시간이나 어색함을 덜 들일 수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또 그렇게 계속 망설이면 정말 할 게 없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 그러니까 이건 내가 잘 모르는 데다가 전문가가 잔뜩 있는 영역이야.. 라거나 이건 내 취향이 아니야.. 이건 좀 마이너해 보여... 같은 것이다. 웃기게도 너무 매이져해도 부담스럽고 너무 마이너해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렇게 딱 맞는 문제가 쉽게 주어지는 인생을 사는 것은 쉽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하면 아예 적절한 문제를 찾을 기회조차 없어져 버린다. 사실 이런 고민은 정확하게 아직 연구 들어가지 않은 학생 시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잘 모를 때 했던 것과 같다. 고민만 하다 아무 논문도 못 쓰면 그냥 나가리되니까 일단 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해서 들어갔고,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드는 주제를 골라 준비하거나 기다리기도 하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논문도 쓰고 연구 들어가기 전에는 환상의 세계(...) 같았던 혼자 논문 쓰기도 하고 있지만 (퀄리티가 욕심을 따라가는지는 차치하고...) 그래도 계속 뭔가 모르는 영역을 계속 탐색하다 보면 계속 물어볼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안다'는 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궁금해진다. 책이나 논문을 단순히 따라간다고 끝이 아니기 떄문이다. 정말 그 내용을 남에게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정말 잘 안다면 그걸 가지고 남들이 아직 하지 않은 뭔가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연구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이 정말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내가 안다고 할 수 있는지 같은 의문이 계속 생기니까.. 논문을 쓰거나 하지 않고 남이 한 것을 보기만 했다면 피상적으로 넘어갔을 많은 애매한 디테일들을 많이 보아 온 입장에서 (괜히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는 말이 있는 게 아닌 듯하다) 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단적으로, 향유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식은 과연 의미가 있는지, 혹은 진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건 지식의 유용성이나 효용성과 다소 결이 다른 문제이다. 응용 가능성이 없는 학문이라고 하더라도 남이 해 놓은 것을 모으기만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못하는 태도는 여전히 문제시되니까...) 반대로, 단순히 논문 좀 썼다고 해서 그걸 정말 아는지도 꽤 생각할만한 문제이다. 어떨 때는 정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는 상태에서 논문을 쓰기도 하고, 혹은 정작 써놓고도 그 뒤의 함의까지 캐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생각하고 굴려봐야 하는 것이다. 그냥 한편 쓰고 더 이상 중요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한두 편 쓰고 덮어버리거나, 논문을 계속 쓰지만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소비하기만 할 뿐 지식이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면에서 진보가 없다면 깊이가 계속 얕은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이 왜 4차원일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좀 재미있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1월에 논문을 썼던 중성미자와 swampland의 관계에 관한 것이 있다. Arkani-Hamed-Dubovsky-Nicolis-Villadoro 등이 처음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표준모형 입자들만 가지고도 3차원 vacuum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려는, 그러니까 3차원 landscape을 보려는 의도였다. 나중에 Ooguri-Vafa의 AdS swampland conjecture (AdS라고 하더라도 초대칭이 없으면 불안정하다는 가설) 논문에서는 사실 이 3차원 vacuum들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냥 3차원으로 감아보았더니 이런 일이 생기더라.. 는 것보다 표준모형 입자들과 3차원 사이의 모순이 있는 게 아닌가..로 이야기하는 쪽이 더 와닿는 것 같다. 이게 정말 맞는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