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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쓸 때마다 드는 느낌은 다르지만 거의 공통된 감상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진흙탕 싸움이 따로 없네..'라는 것이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고.. 처음 주제를 생각해 낼 때는 나름 근사하게 보여도, 진행하다 보면 논문을 그닥 끌리지 않게 만드는 요인들이 자꾸 튀어나온다. 어떨 때는 정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완성하는 것이 그만두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지금까지 연구라는 일을 하면서 배운 교훈 중 하나다. 계속 생각하다 보면 적어도 연착륙이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한데, 그 속에서 다음 논문을 위한 씨앗이 숨어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다음 논문이 근사하리라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F. Dyson 선생이 쓰셨던 글 생각이 난다. Black hole에 관한 이야기인데, 현 시점에서 이론 물리 중 가장 '이론스러운 것' 중 하나가 블랙홀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블랙홀 개념의 근간인 일반상대론을 발견한 A. Einstein은 물론이고, 블랙홀을 생각해 내는데 가장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한 R. Oppenheimer 마저도 정작 블랙홀에 대해 상당히 시큰둥하셨던 것. (오펜하이머 영화를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1일에 관련 연구인 Oppenheimer-Snyder의 논문이 출판된 일화가 나온다. 사실 이것보다 좀 더 극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같은 날 나온 Oppenheimer-Snyder 논문의 바로 앞 논문이 다름 아닌 Bohr와 Wheeler의 핵분열 논문이다. 그냥 제목부터 the mechanism of nuclear fission.... 2차 대전 동안 Bohr 선생의 행보까지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왜 그런지 다이슨 선생도 꽤 궁금하셨던 것 같다. 아인슈타인 선생 같은 경우, 다이슨 선생 입장에서 막 물리 이야기를 같이 하기에는 좀 어려웠던 것 같다. 워낙 유명인사이고, 정치적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다 보니 바쁘신 몸인 것도 있지만, 이미 시간이 멈춰버리신지라 당시 젊은 물리학자들에게는 전설 중 전설이긴 하지만 배울 건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셨던 것 같다. 양전닝 선생도 비슷한 회고를 하신 적이 있는데, 약한 상호작용에 대해서 관심은 둘째치고 알고 싶지 않아 하신 것에 대해 적잖게 상처받으신 적이 있으시다고.. 마찬가지로 오래된 전설인 보어 선생이 계속 젊은 학자들과 물리 이야기를 하고 당시의 이슈에 대해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하고 계셨던 것과 대조되었다는 것 같다. 대신 오펜하이머 선생의 생각을 들을 기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아인슈타인 선생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게 아니라 블랙홀은 본질적인 물리와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기하학의 언어로 세상을 볼 것을 제안한 덕에 미적인 가치까지 얻었던 일반상대론 자체의 구조와 비교했을 때 더더욱 그런 생각을 가지셨던 것 같다. 아인슈타인 선생은 이미 그런 '아름다운' 이론을 발견한 적이 있다 보니 '사소한' 현상들은 신경 쓰이지 않고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탐색하려고 했던 것 같다. 오펜하이머 선생은 자신의 전 세대에 해당하는 아인슈타인이나 보어 선생 등이 남겼던 아름답고 웅장한 것을 본인이 발견하고 싶어 했기에 계속 추구하셨던 것 같다. 자신의 지적 능력에 자신감이 있으셨으니 더 그런 면도 있었을 것이다.
다이슨 선생은 그런 '아름답고 웅장한, 본질적이고 불멸일 수 있는 업적'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고슴도치에 비유하신다. 중요한 문제를 정해서 끝을 볼 때까지 파고드는 것인데, 어떨 때는 우직함을 넘어서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성공하면 말 그대로 불멸의 업적이 된다. 한 세대는커녕 몇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일이라는게 문제이긴 하지만 한데, 그런 성향의 연구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도 있다. 이 고슴도치와 반대되는 유형으로 제시된 것이 여우형 연구자이다. 연상되는 대로 번뜩이는 재간을 바탕으로 여러 방향의 문제를 계속 건드는 유형이다. 다이슨 선생이 염두에 둔 분은 당연히 R. P. Feynman 선생이고..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실 여우라고 불멸의 업적을 남기지 말라는 법은 당연히 없다. 본질을 건드리지 못하라는 법도 더더욱 없고. 마찬가지로 그런 유형의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도 존재하는 것이겠지 싶다. 그런 면에서 인상적인 것이 파인만 선생의 칠판인데, 돌아가신 뒤 연구실에 남겨진 칠판을 찍은 사진을 보면 상당히 재미있다.
https://digital.archives.caltech.edu/collections/Images/1.10-29/
'내가 창조해낼 수 없으면 이해한 것이 아니다' 라거나 '이미 풀린 모든 문제를 알아야 한다' 같은 자기 암시인지 중2병의 잔재인지 모르겠다 싶은 하지만 그분이 쓰셨기에 명언으로 남은 말도 있지만, 그 옆에 Bethe ansatz, Kondo (콘도 효과일 것 같은데 화살표 그어놓으신 건 정복하셨다는 건가...) 2차원 Hall 효과, Unruh 온도, 비선형 고전적인 hydro(dymamics?) 같은 아주 다양한 방면의 이야기들이 알아야 할 것.,, 이라는 위시리스트로 정리된 것이 꽤 인상 깊었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순간에도 알고 싶은 것, 풀고 싶은 것을 쌓아놓고 계셨다는 게 인간을 넘어선 뭔가를 보는 기분이랄까... 자신의 시간이 멈추지 않었으면 하는 욕망도 느껴져서 괴테의 파우스트가 연상되기도 했다.
알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을 판단하는데는 자신이 물리를 보는 관점이 분명히 들어있을 것이다. 그거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물리 자체에 근거한 판단일수록 가치 있어 보인다. 그걸 할 수 있는지는 좀 다른 문제이지만... 그러니까 파인만 선생처럼 죽기 직전.. 같은 시간 여유의 유무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지? 같은 능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고, 알면 좋은 것이기도 하다. 예전에 업계에서 자주 듣던 이야기 중 하나가, '블랙홀 같은 주제는 서양의 썰 잘 푸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논리를 감당할 수 없으니 그런 건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대신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디테일한 계산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는데, 음.. 물론 그것에만 매달리고 다른 주제는 쳐다보지도 않다가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거나 (한단지보 같은 말이 그런 상황을 이르는 것일 것이다 : 본인만의 한정된 관점을 가지고 통일장 이론을 추구하시다가 잊혀지셨던 말년의 아인슈타인 선생도 그런 경우겠지만...) 구체적인 계산은 안 하고 사변적인 이야기만으로 겉멋만 부리려다 오히려 내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만 되읊기만 하여 (계산이 안되면 분명히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인 것은 이해하겠다. 나도 그런 유형은 상당히 싫어하니까.. 하지만 관심을 가지거나 궁금해하는 것 자체까지 금기시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어떨 때는 물리학자들이 오히려 비합리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합리성에 집착하지 않나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과소평가되기 쉬운 것이 공상에 가까울 수 있는 '꽃밭에 가까운 머리 속'이다. 이게 평상시에는 바보 같아 보이는데, 어떤 상황에서는 합리성에 대한 집착만으로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게 하는 면도 있다. 그리고 그건 비단 물리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블랙홀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 '하면 안된다'라는 확언의 형태에 된 것에는 그런 자신들의 이상적인 과학을 하는 형태로는 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투 혹은 혹시나 그런 사람이 내 옆에 있을 때 위축될 자신의 입지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이 아주 약간이나마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