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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소설이나 영화 보다 현실이 더 드라마틱하다는 말들을 듣게 된다. 역사를 보아도 그렇고, 한 인간의 삶을 보아도 그렇고, 뭔가 아이러니한 상황을 꽤 자주 만나기 마련이다. 그만큼 세상에는 내가 모르거나 과소평가하는 요소가 많다 보니 너무 쉽게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오만한 자세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장 연구만 해도 그런 면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어떤 목표가 있고, 그것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사람도 뭔가를 건질 수 있다는 것은 아니고, 연구 자체가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을 하나씩 건져내는 것이다 보니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내가 풀고 싶어 하는 문제의 힌트가 숨어 있는 일이 많다는 것. 그래서 내가 이런 방향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말 그대로 인생을 갈아 넣더라도 제대로 된 답을 건지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는 그 문제에 관심조차 없었고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 문제를 아주 간단히 풀어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억울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아이러니는 그런 실패가 나중에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아주 좋은 성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끈이론이 정확하게 그 길을 따라간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 제안된 것은 S-matrix 이론의 관점에서 강한 상호작용을 보려는 시도였고, 그 게임에서는 실패했지만, 양자중력 이론으로 부활했으니.. 그래서 자주 하는 말이, 산을 정복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 못지않게 천천히 산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보는 쪽 역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건 간에,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실제 세상과 일치하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이 좋은 결과를 준다는 보장도 없으며, 굳건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 물리의 경우도, 어떤 것이 물리의 영역이냐는 영원히 고정된 것은 아니다. 내가 물리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물리를 보는 관점이라고 '교육받은' 것이고, 이것은 역사와 경험의 산물이다. 당연히 현재와 미래의 진행 방향에 따라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폐기될 수도 있고, 뜻밖의 영역이 물리의 영역으로 들어와 많은 것을 이해하게 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내가 인지하고 있는 세계는 실제 세계와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간극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자연의 이치 혹은 신의 섭리를 이야기하고 강한 신뢰를 보였지만, 실제 이야기된 것은 '그렇다고 믿어온 것'이지 '그 자체'가 아니었다. 물론 이게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오랜 비판과 도전에도 살아남은 것이니까. 하지만 영원하거나 절대적이지도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가끔 물리를 하는 사람 중에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물리를 물리의 본질이라고 과하게 확신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고, 생각하는 영역을 과하게 제약하고 이 이상은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 그리고 그 안은 나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 (그래서 나만이 독점적인 권리와 전문성을 가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게 주는 결과는 꽤 다양하다. 작게는 자신의 가능성을 제약하거나 자신의 분야, 혹은 자신의 학계 내에서의 위치를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절대화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보는 것에 인색한 태도를 가지게 하고, 결국 생각의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 정체되게 만든다. 크게는 배팅을 건 자신의 일이 실은 완전 꽝이라거나, 아니면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를 빠져나갈 가능성이 없는 굴 속에 묶어버린 나머지 실패하게 만들기도 했던 것 같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상황에서 너무 일찍 과한 확신을 가질 때 그런 것이 더 두드러졌던 것 같다. 자신의 세계를 너무 일찍 만들면 너무 좁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거나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였다. 결국 자신만의 혹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만의 생태계를 만들지만, 그것이 통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도 나름 근거가 있는 것이니 몇몇 사례에서 성공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성공이 자기 확신을 너무 심어줘서 자신의 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면, 교수가 된 다음 몇 년 사이에 알게 되거나 할 수 있게 된 것이 학생이나 포닥 때 같은 기간 동안 얻은 것보다 오히려 많았던 것 같다. 수업 등의 일로 물리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었고, 그것 때문에 지금도 상당히 답답함을 느끼는데도 말이다. 가장 큰 변화라면, 무엇을 해야 한다라고 했을 떄 그 '무엇'에 대한 제약이 풀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싯적 주변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되던 것 혹은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이야기되었던 것 중 실제 그런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많은 경우, 좁은 식견과 얕은 경험, 혹은 편향된 생각 및 인간관계의 산물이거나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어 자기 합리화를 하는 과정이었다. 교수가 된 다음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점점 눈에 들어오면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들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공부를 하거나 연구를 할 때, 내용 자체보다도 다른 목표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상, 시험에서의 점수 내지는 학점, 연구비, 직장, 커뮤니티 안에서의 위상 같은 것들이다. 물론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그 중에는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들인 것들도 많지만, 분명히 전부는 아니고 적어도 논문 안에서는 물리 자체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는 것들이다. 논문 내용의 물리적 의미는 관심도 없는데 어느 학술지에 보내야 점수를 더 많이 받을지를 더 중요하게 고민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은 아무래도 본말전도이다. 본인은 그것을 합리적인 행동이고, 객관적으로 재능을 인정받는 방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소싯적 시험 점수나 등수 따지는, 혹은 누가 먼저 어떤 책을 봤는지 경쟁하는 버릇과 크게 다르지 않은 면도 있다. 연구를 하다 보면 또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경쟁 속에서 성과가 나오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 그런 요소들과는 상관없이 궁금해서, 혹은 관심 있는데 모르는 것이 있을 때 거의 충동적으로 한번 보자고 해서 본 쪽이 더 괜찮은 결과를 준 일도 많았다. 후자의 경우는 상당히 중요한 교훈을 주었는데, 궁금하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 시간이 허용하는 한 바로 들어가 보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 한번 미루면 계속 비슷한 해야 할 것들이 쌓이고, 결국 그것들이 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줘서 평생 못 볼 수도 있다. 의외로 자주, 숙련된 학자들조차 뭔가를 더 알기 위해서 머리를 쓰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나 마땅히 거쳐야 할 단계를 회피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데, 혹은, 좁은 식견 안에서 어설프거나 편향된 판단을 내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더라.. 나도 그런 것에서 자유롭지 않으니 막 뭐라고 할 처지는 안되더라도 계속 보고 있자면 뭔가 환멸감 같은 감정이 들 때도 있다. 그게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되면 어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인생 다시 시작하고 싶기도 하지만... 어째 나는 그런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