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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주변에 있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내 생각에 긍정적인 사람의 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 생각이 통하거나 마음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고독감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 다른 곳으로 홀연히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그렇게 해서 옮긴다 해도 외로움이 덜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심화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비슷한 성격의 조직이면 어느 곳이든 공통적인 분위기 혹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일단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정말 외로움이 극대화될 정도라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주변의 문화 자체에 자신의 생각과 상당히 맞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이상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는 주변 사람들이 집단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보일 것이고, 알고 보니 그게 진실일 (즉 나 홀로 제정신일) 가능성도 상당히 많다. 평소에는 호의적이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살다가 어느 한순간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주저하거나 한번 더 생각하는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 내지는 합리적이지 않음을 고치려는 격한 반응들을 갑자기 접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리고 그때 드는 당혹감 내지는 괴리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론 어떤 집단에서 당연시되는 것이 있다면 그 뒤에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행동이나 생각 자체의 합리성 혹은 당연함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 물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지금은 박사 학위를 받은 현상론과 다소 거리가 있는 연구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뒤를 돌아보면 당연함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한정된 범위 안에서 작용하는 것 같고, 때로는 주변 환경이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 사항이 coherent 하게(...) 뭉쳐진 결과가 아닌가 싶을 때가 꽤 많았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내 생각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결정하려다 보면 이물감이 느껴질 때가 종종 생긴다. 그게 계속 어떤 대상을 볼 때마다 회의감을 가지는 습관으로 굳어진 것 같은데, 동시에 나를 어떤 집단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리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어떨 때는 그런 성격이 울적함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로 현명함을 얻은 것 같아서 후회나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물리학자 중에서 녹아내리지 못해서 느끼는 고독감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A. Einstein 선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도교수의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자를 많이 길러서 학파를 만든 것도 아니다. 논문도 보면 누구와 같이 논문을 쓰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고 밀어붙여서 성공했고, 정확하게 그 이유 때문에 양자역학이 주류가 된 물리학계에서 고립되었다. 사람들은 Einstein을 물리학자의 아이콘으로 떠올리기도 하지만, 정작 내가 보기에는 내가 알고 있는 물리학자 중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이다. 신이나 운명이 있다면 그런 사람도 최고의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Einstein의 삶을 설계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아니면 그런 성격이었기에 아무나 못하는 일을 했다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의 수학자인 A. Conne 선생은 본인이 생각하는 세상을 설명하는 물리 모형에 대해 물리학자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서 서운하셨는지, 수학자들은 fermion처럼 행동하고, 물리학자들은 boson처럼 행동한다, 그러니까 수학자들은 독립적인 생각을 내세우는 것을 중요시하는 반면 물리학자들은 몰려다니면서 집단적인 의견을 만드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A. Grothendieck 선생이 크라포르트상을 거절하면서 자신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희생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서 정말 그런 건지는 생각해 볼 일이기는 하다. (개인적으로는 수상 거부가 꽤 인상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유명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은 상을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매우 안정된 선택이고 그것을 통해서 수상자 측의 권위가 유지되는 것이겠지만, 수십 년 전 업적으로 수십 년에 걸쳐 상을 계속 받는 것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정말 학문의 발전에 압도적으로 긍정적인지는 애매하기 때문이다) 정도나 방향은 다르더라도 전문가의 집단이 있고 그 속에서 어떻게 인정받는지에 따라 전문가로서의 생존이 결정되는 것은 비슷하지 않을까...
어제 arXiv에 새로 올라온 논문을 보다가 제목이 인상적인 것을 하나 보게 되었다. (짧기도 하고...)
O. Trivedi, A. Loeb,
On the Cosmological Constant-Graviton Mass correspondence
2411.12757 [gr-qc]
https://inspirehep.net/literature/2850215
살펴보니까 de Sitter 공간에서는 graviton도 Hubble scale의 2배에 해당하는 질량을 가진다..는 이야기였는데,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작년 이맘때 즈음 논문 쓰면서 주의 깊게 본 부분이었다. ( https://dnrnf1.tistory.com/m/30 ) 그리고 이 주장은 사실 좀 애매한 면이 있다. de Sitter의 질량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그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free particle 운동방정식에서 Laplacian을 제외한 부분을 질량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de Sitter에서의 중력파를 이야기하다 보면 해당 부분을 질량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그게 맞는 해석이냐면.. 일단 질량이라는 것이 관찰자와 상관없이 같은 값으로 측정되어야 하는 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de Sitter isometry의 quadratic Casimir와 연동될 수밖에 없는데, 이게 Laplacian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 그래서 적어도 현재 얼추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운동방정식이 Laplacian +질량^2 꼴이 아니라 Laplacian + 상수 H^2 + 질량^2이라는 형태라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특히 spin-2인 graviton의 경우 두 번째 항의 상수가 4가 된다. 이 논문에서 이야기하는 중력자의 질량은 사실 이 부분에 해당한다. 물론 이론적으로 질량을 어떻게 정의하든 상관없이 관측적인 면에서 파동의 dispersion relation을 통해 질량을 정의하려고 한다면 그런 엄밀함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고, 그냥 Laplacian 이외의 부분을 질량^2이라고 퉁쳐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논문에서 보는 관점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애매함이 생각보다 자주 이론 하는 사람마저도 혼란스럽게 한다. 다른게 아니라 de Sitter 공간에서 질량이 2H 이상 되어야 한다는 Higuchi boubnd 때문이다. 실제 Higuchi 선생 논문을 보면, 질량은 운동 방정식 중간에 나오는 상수 H^2를 제외한, 즉 quadratic Casimir을 통해 이해되는 질량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정확한 문장은 질량이 0이 아니라면 그 값은 2H 보다 커야 한다.. 정도일 것이다. Swampland program과 관련해서 Higuchi bound 이야기가 꽤 자주 나왔는데, 의외로 많은 논문에서 그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상수 H^2까지 질량에 포함시켜서 '모든 질량이 2H 보다 커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작년에 논문을 쓴 목적 중 하나는 논문 독자들이 Higuchi bound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알았으면 하는 것도 있었고, 그래서 관련된 참고 문헌을 나름 정리해서 논문에 반영했었다.
이게 나름 흥미로웠던 것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배경 지식을 가진 집단에서 접근하다 보면 서로 의견 교환을 잘 하지 않고, 심지어 기본 개념이나 수식 표기 방법 등의 문제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있어서 혼란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 제대로 합의 내지는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수십 년 동안 방치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두 집단에서 같은 결론을 독자적으로 발견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같은 학교 같은 건물에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면 같은 이야기를 서로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해가 지나도록 눈치채지 못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심지어 그곳이 각자의 업계에서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해서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매일 arXiv에 새로 올라오는 논문을 확인할 때 자신이 속한 분야 밖의 논문까지 채크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hep-th 사람이 hep-ph나 astro-ph 까지 확인하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Cross list 처럼 다른 분야가 main이라고 해도 sub 분야를 적으면 그곳에도 같이 논문이 올라가도록 한 것도 그것 때문일테니까.. 이것과 관련해서 2013년 Princeton IAS에 스쿨 참석차 방문했을 때 N. Arkani-Hamed 선생이 '나는 다른 영역까지 다 확인한다'고 상당히 자랑스럽게 (이 분 이야기에 확신이 안들어갈 때가 얼마나 있겠냐만...) 이야기하시는 걸 본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를 기점으로 amplihedron 연구 등을 통해 hep-ph 보다 hep-th 쪽 논문을 훨씬 많이 올리시기도 하셨으니.. 굳이 연구 집단 문제가 아니더라도 지리적이든 정치적이든 과학의 주류가 있는 곳과 거리가 있는 곳에 내가 속해 있다면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고... 그런 의심이 강하게 들게 만든 글이
M. Novello,
The Mass of the graviton and the cosmological constant puzzle
astro-ph/0504505 [astro-ph]
https://inspirehep.net/literature/681126
이건데, 우주상수의 natrualness 문제를 이렇게 풀고 있다. de Sitter의 energy 밀도는 3H^2 M_{Pl}^2이기 때문에 horizon 안에 있는 전체 에너지는 대략 M_{Pl}^2/H이다. 중력자의 질량이 2H (사실 de Sitter에서의 질량 문제는 이 논문이 나온 2005년과 매우 가까운 2003년에도 S. Deser, A. Waldron 등이 논의할 만큼 당시에는 비교적 최근 이슈였기 때문에 저자분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질량 개념에 대한 구분은 하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일단 상수 H^2까지 포함해서 질량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중력자가 2H라는 질량을 가진 것으로 기술한다)인데, pure de Sitter는 아무 물질도 없고 오직 geometry만 존재하는 상황이니까 중력자만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중력자 개수를 헤아리면 에너지/질량이라서 M_{Pl}^2/H^2이 된다. 다시 말해서 H 값 즉 우주 상수값이 매우 작은 것은 horizon 안의 degrees of freedom이 많다는 의미이다. 이게 재미있는 것은, 요새 swampland 쪽 사람들이 작은 우주상수가 실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면서 주장하는 내용과 정확히 같기 때문이다. 조금 더 이론적인 언어로 이야기하면, de Sitter의 Gibbons-Hawking entropy가 horizon의 면적에 비례해서 M_{Pl}^2/H^2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세상의 자유도가 많다는 것이 H 값이 작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20여 년 전에 했는데,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 무렵에 꽤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T. Banks,
Cosmological breaking of supersymmetry?
Int.J.Mod.Phys.A 16 (2001) 910, hep-th/0007146 [hep-th]
https://inspirehep.net/literature/530466
E. Witten,
Quantum gravity in de Sitter space
hep-th/0106109 [hep-th]
https://inspirehep.net/literature/558356
라거나..
M. Novello 선생 논문을 보면서 재미있었는게, 같은 주장을 꽤 다른 표기방법으로 (아무래도 astrophysics의 언어에 가깝게 광속, Planck 상수까지 다 살아 있고 3H^2를 우주상수 Lambda로 표기하고 있다) 이야기하고 있고, Gibbons-Hawking의 entropy 이야기는 인용되어 있지 않아서 Gibbons-Hawking 논문의 존재를 적어도 논문을 쓸 시점에는 인지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나 싶었기 때문이다.
이론물리는 기본적으로 특허권이나 엠바고에서 자유로운 열린 계를 지향하긴 하지만, 실제로 돌아가다 보면 자신의 세계에 녹아내려 그곳에서 맺어진 인간관계 이상으로 나가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다. 개인으로 보다라도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에 몰두하다 보면 같은 업계라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고.. 그게 어떤 면에서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경계인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