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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거리 찾아서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머리 좀 식혔으면 좋겠다 싶을 때 타이밍 좋게 7월 말에 쓴 논문 referee report가 왔다. 보통 논문 쓰면 사람들 반응도 볼 겸 해서 바로 학술지에 투고하지 않고 묵혀두는데, 8월에 미국 방문하고 어찌 저찌 하는 통에 1달이 지난 8월 말에 투고하게 되었다. 그렇긴 한데 굳이 미국 일이 아니라고 해도 요새는 논문 쓰면 거의 한 달 정도 뒤에 투고하는 일이 일상이 된 것 같다. 그때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아무튼 올해는 투고한 논문 전부 리뷰 기간이 거의 두 달을 잡아먹었지만, 그래도 결과들이 대체로 출판에 호의적이라서 다행이다. 이번에도 사소한 것 몇 가지만 고쳐내면 되는 것이라서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accept에는 문제없을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에 좀 특이한 점이라고 하면 Physical review letters도 아니고 Journal of High Energy Physics인데 referee가 두 분이나 붙으셨다는 것? JHEP와의 인연이 근 13년인데 referee 두 분은 처음이다. 일단 첫 번째 referee께서 별 지적 사항 없이 accept 판정을 내리신지라 editor께서 좀 미심쩍으셨는지 좀 더 센 분 -_- (내용을 읽어보니 해당 논문의 오리지널 아이디어와 관계된 분 같다...)에게 review를 의뢰한 것 같다. 두 달 걸린 게 그 때문인 듯한데.. 다행히 두 번째 referee 분도 꽤 재미있게 읽으셨던 것 같고, 몇 가지 코멘트 더 넣으면 좋겠다라거나 이거 실수했으니 고쳐라 정도에 그쳐서 일단 순항 중인 것 같다.
어쨌건 내용에 호의적이면 일단 안심이고, 내가 모르던 내용이 나오면 매우 감사한 상황인데, 이번에도 배운게 좀 있는 것 같다. 꽤 많은 경우, 사람들이 이미 한 중요한 이야기를 내가 인식하지 못한 채 다른 방식으로 보이거나 관련된 작은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논문을 쓰게 된다. 올해 논문도 그런 경향을 강하게 보이는데, 어떻게 보면 이상하지 않은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swampland conjecture 이야기는 보통 초끈 이론을 전공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로 이야기하다 보니 논문을 천천히 읽으면서 핵심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감이 있다. 어떤 경우는 기술적인 것 혹은 중요하긴 한데 초끈 이론에 익숙할 때에야 금방 알아볼 수 있는 것에 매달리다가 정말 핵심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기 전에 지치는 경우도 많고, 그게 계속되면 남의 이야기를 보기만 할 뿐이지 내 이야기를 못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되면 문헌 찾기를 멈추고 나라면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할지 혼자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 와중에 이거다 싶어서 논문 작업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다. 물론 누군가가 이미 이야기를 했을 수 있고, 사실 그럴 확률이 높긴 하지만 분명히 생각하는 방식이나 알고 있는 방향이 다르다 보니 같은 결론이라도 같은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고, 내 성향상 내 방식이 좀 더 직관적일 가능성이 크기는 하다. 그리고 누가 이미 했는지와 상관없이 일단 내가 어느 정도 줄거리를 파악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스스로 줄거리를 만들 필요가 있기도 하다. 어떨 때는 내 줄거리에 신경 쓰다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못 잡는 경우도 있고 해 놓고 보면 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싶긴 한데, 결국 맞는 방향이면 어떻게든 합쳐지지 않을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짧은 시간 안에 따라잡거나 아직 아무도 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일을 내 방식대로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은 계속 있다. 그러니까 수시로 책 보고 논문 분석하고 하는 것이고.
사실 지금 연구자로서는 좀 위험한 방식으로 연구하는 감은 있는데, 다른게 아니고 계속 혼자 한다는 것. 그게 계속 걸리기는 하지만 솔직히 당장은 뭔가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분야를 교수까지 된 다음에 덤비는 건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장점이라면 생존 걱정 안 하고 소신껏 할 수 있고 좀 실수해도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단점은 늙어서(?) 초심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받아줄 사람이 많을 리가 없다는 점이다.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학생도 아닌 사람이 서툴게 하면서 관심을 가져봤자 그런 사람과 뭔가를 했을 때 얻는 이익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현실이라서.. 정말 기본부터 설명하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당장 자신의 앞에 있는 일이 바쁜 상황 + 나 아니라도 아주 잘 알고 편한 대화 상대는 넘쳐나는 상황에서 베풀 수 있는 호의는 한정될 수밖에 없고, 내 입장에서는 그것을 효율적으로 얻기 위해서라도 일단 내가 많이 굴러서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알아내야 할 처지이다. 그리고 교수까지의 짬밥도 있다 보니 학생 때보다는 덜 막연해서 해보자 싶기도 하고.. 당장 옆에 뭐 물어볼 사람도 없다 보니 멀리 있는 누구에게 물어보려고 생각을 정리하려다 보면 그냥 내가 알아서 찾아보는 것이 낫기도 하다. 이리저리 하다 보니 + 나도 연구 말고 가르치는 등의 일을 해야 하니 어찌어찌 혼자 하게 되고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솔직히 좀 답답하기도 하고 너무 효율 낮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겨우 겨우 알아냈지만 이미 아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안다면 좀 그렇긴 하지 않겠나. 그렇긴 한데 과거를 돌아보면 이게 내 업보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물리에 대한 강한 교훈을 배운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논문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나만 신경 쓰고 있어서 일단 최대한 조사하고 생각하고 하는데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겠고 대화를 해도 딱히 돌파구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얼기설기 한 생각대로 논문이 진행되는 일이 상당히 많아서, 괜히 틀려놓고 그때 왜 안 고쳐줬냐고 남 탓 하느니 틀려도 내 탓이고 맞으면 내 복이다..라는 식으로 내가 알아서 논문 쓰는 게 속 편한 감도 있다. 이게 연구에서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게 유감이긴 한데 어떻게 보면 내 재주는 그냥 맨 땅에 헤딩하기일지도. 머리 회전이 빠르지 않아서 뭔가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도 누군가와 같이 연구하는데 좋은 신호가 아닌 것 같다. 내 이름이 들어간 논문인데 내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니 내가 직접 공부해 보고 그걸 가지고 논문 쓰는 데는 혼자가 눈치 안 보이는 면도 있다.
여하간... 7월 말에 쓴 논문에서 이야기한 것 중 하나는 굳이 중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non-renormalizable interaction이 있다면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입자 수가 많아질 때 perturbativity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species scale을 정의할 수 있고, 그 scale이 중력에 의해 주어지는 species scale보다 작다는 조건을 주면 weak gravity conjecture와 같은 bound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꼭 작아야 할까? 좀 다른 방향에서 필연성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referee report에서 그 이야기를 해 주는 논문을 알려주었다. 좀 오래된 것이긴 한데...
B. Heidenreich, M. Reece, T. Rudelius,
The Weak Gravity Conjecture and Emergence from an Ultraviolet Cutoff
Eur.Phys.J.C 78 (2018) 4, 337 1712.01868 [hep-th]
https://inspirehep.net/literature/1641280
작년에 관심을 가졌던 emergence proposal과 엮을 수 있다는 것. 낮은 energy에서 gauge field의 dynamics가 (kinetic term이기도 하고, 동시에 gauge coupling이기도 하다) UV에 있는 charged particle로 이루어진 tower of states들의 효과라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낮은 energy에서 나오는 perturbative한 효과들은 사실 UV에서의 non-perturbative dynamics의 결과라는 건데.. 굳이 non-renormalizable interaction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gauge 상호작용이 강해지는 scale이 양자중력 scale보다 작다는 조건을 주면 weak gravity conjecture가 나온다는 점이 좀 특이했다. Emergence에 등장하는 tower of states의 집단 효과라는 게 perturbative field theory에 익숙한 입장에서 상당히 이질적이긴 한데, 적어도 초끈 이론에서는 이런 식으로 뭔가 자꾸 parametric control이 안 되는 영역 혹은 moduli space의 안쪽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느낌이 있다. 그게 초끈 이론의 특징인지 아니면 중력이 가지는 고유한 성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떨 때는 중력의 세계라는 게 locality라거나 perturbativity 같은, 중력이 없는 장론을 계산하기 편하게 만드는 여러 요소들이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왜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다 깔끔하게 정리된 것으로 보이는 것일까.. 굳이 이야기하면 양성자 안에는 복잡한 parton들이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등 별 일이 다 일어나지만 spin과 같은 많은 성질들이 아주 깔끔하게 quark 3개의 배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지와 비슷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요새 하고 있는 것도 문제가 생겨날 듯하면서 안나는 상황인데 어찌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