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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모나가 신이치로 선생의 회상
    카테고리 없음 2024. 9. 13. 10:07

     지금 시점에서 과거의 물리 연구를 보면 '그때는 지금보다 좋은 연구를 할 기회가 많았구나'라는 인상이 들기 쉽다. Sakurai 양자역학책을 보면 간단한 계산 문제에 이거 몇십 년 전에 풀었으면 Physical review letters에 논문 실렸을 거야..라는 코멘트를 한 것이 있는데, 비슷한 심리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경우 그게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당장 Sakurai의 '그' 문제도 문제를 푸는데 필요한 아이디어가 그 당시에는 매우 낯선 것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당시 사람들 중 중요성을 인식하거나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던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연구 거리가 손에 손쉽게 잡히고 그게 다 중요한 일이 될 수 있었던 시절이 진짜 있었다면 주변에 중요한 일을 한 사람들이 넘쳐났을 것이다. 실제 그렇지 않은 것은, 지금은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이는 것도 그 당시에는 불확실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토모나가 신이치로 선생의 '스핀은 돈다'라는 책을 심심할 때 슬쩍 슬쩍 한 번씩 보는데, 마지막 단원은 물리 이야기라기보다는 자신 주변에 일어났던, 30-40년대의 일본 물리학계의 이야기이다. 지금 입장에 보면 그 당시는 양자장론이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많은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시기이지만, 양자역학의 창시자들이 독일이나 코펜하겐 등 물리학의 중심지에 모여서 여러 가지 일들을 몇 년 사이에 진행시켜 미친 듯이 발표하던 시점이기도 했기 때문에 많은 초심자들이 주눅 들기 좋은 환경이었던 느낌이 든다. 당시 일본의 경우,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물리 연구의 변방이었고, 전쟁 등 정치적인 폭주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활발한 교류를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을 텐데, 그 상황에서 나중에 대가가 될 토모나가 선생은 어떤 것을 느꼈는지가 적혀 있었다. 재미있게도 지금 내가 느끼는 것과 꽤 비슷하다. 나보다 훨씬 머리도 좋았을 것이고 유카와 히데키 선생 같이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동료가 있었음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셨다는 게 약간은 낯설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저 사람은 천재다라는 생각을 벗겨내면, 혹은 천재라도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면,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쉽게 다음 단계를 생각해 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당시 제대로 된 (초기의 혼란상이 정리된 뒤 체계성을 갖춘 논리로 설명된) 양자역학책은 아마 Dirac 선생의 The Principles of Quantum Mechanics 이전에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책들이 일본까지 들어오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고. 특히 후발 주자인데다가 대공황+전쟁까지 겹친 일본 상황에서는 기계나 전기 등 공학적인 면에 집중했을 것이라서 양자역학을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로 토모나가 선생은 M. Born의 Problems of atomic physics 책이나 Schrodinger 선생의 논문들을 보고 양자역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는데, 낯선 분야를 공부할 때 만나는 전형적인 어려움을 이 분도 겪으셨다. 논문을 보면 설명이 안되어 있어 참고 문헌을 보아야 하는데 그러면 또 그 참고 문헌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참고 문헌을 보아야 하고.. 하는 식으로 한 문장으로 넘어가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보아야 할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물론 그 참고 문헌들이 내가 이해하기 편한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보장도 당연히 없고.. 그래서 '논문의 망망대해 속에서 나 혼자서 허우적대는' 상황이 벌어졌고, 토모나가 선생이 약골 + 천천히 다져가며 이해하는 스타일인 것도 있어서 양자역학을 연구하기로 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으셨다고 한다. 어떻게 어떻게 대가들의 강의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느끼고 나서 보면 '경쟁자들은 또 앞으로 나아가서' 연구의 최전선에 같이 설 수 있는 것이 가능한지조차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과 '스스로 무엇인가 일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도 꽤나 괴로운 점이었던 듯하다. 어느 정도 이해해서 어떤 분야 (토모나가 선생 입장에서는 양자역학으로 분자를 이해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는데, 막상 보니 중요한 물리적인 문제는 다 풀려버리고 (적성에 그다지 맞지 않은) 세부적인 계산을 하는 것만 남아 있다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보고 나니까 양자역학을 양자중력/초끈 이론 같은 것으로 바꾸면 그냥 내가 지금 느껴서 여기에 계속 써 왔던 신세한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토모나가 선생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그 다음 세대의 관심사가 될 핵물리와 전자기의 양자화로 연구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게 운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계속 고민되는 상황에서 여러 생각을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합리적인 결론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계속 허우적대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문제 쪽으로 관심사가 흘러갔을 수도 있다. 여하간 토모나가 선생은 자신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를 해결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노벨상까지 받으셨지만, 그건 그분의 인생이고.. 문제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인가.. 일 것이다.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정말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좋은 방향인지, 그리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적절하게 진행되고 있는지가 불확실할 수밖에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그런 고민이 단순히 좋은 물리학자가 되려고 하는 야심의 문제 이전에 내가 정말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지?라는 근본적인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와 별개로 '물리학자 노릇을 하는 나의 가치'를 생각할 때 묻게 되는 것인데... 생각해 보면 그것에 과몰입한 경우가 수학자인 G. H. Hardy 선생인 것 같다. 순수수학자라는 자신의 역할을 자신의 존재 가치와 동일시한 면이, 이 분의 수필집인 '어느 수학자의 변명'에 정말 강하게 녹아 있는 것이 느껴져서.. (그래도 머리 안 돌아가신다고 독약 드신 것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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