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묘사...
    카테고리 없음 2024. 8. 26. 03:51

    묘사(description)가 본질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종종 가져본다. 하나의 물리적인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묘사하는 방법은 아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특정 방법을 택했을 경우 아주 잘 드러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숨어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동시에 볼 수 없고, 그런 면에서 보면 같은 내용이라도 길게 적분들이 늘어져 있는 것보다 간단하고 깔끔한 형식으로 적을 때 머리가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더 크게 보면, 기존의 물리와 다른 새로운 이론 체계가 필요할 때, 그것에 맞는 보다 간단한 표현 방식이 나타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면도 있다. 상대성 이론을 계속 3차원 공간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보다 4-vector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본질에 가깝기도 하고 표현이 단순해진다거나, 양자역학에 녹아있는 선형성을 bra-ket notation으로 적으면서 파동함수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 더 용이해진다거나 하는 것들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신기한 것 중 하나는 동등한 여러 기술 방식 중 한 가지만 특정 상황을 제대로 기술할 수 있는 경우이다. Gauge invariance가 있을 때 양자화는 path integral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operator formalism에서는 솔직히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아마 시도해서 성공한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path integral보다 간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field)으로 옮길 때, 많은 경우 학부 때 주로 배운 비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 이해한 것들이 대체로 잘 통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50-60년대 axiomatic quantum field theory 혹은 algebraic quantum field theory를 정립하는 과정에서부터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이야기되어 왔다. 직후에 연구의 관심이 gauge invariance의 양자화로 옮겨지면서 그런 연구들은 수학적인 논의 정도로 여겨지게 된 것 같다. 말하자면 당장 연구하는 물리학자 입장에서 새로운 물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대상은 아니게 된 것이다. 물론 수학 입장에서 보면 'gauge invariance의 양자화까지 포괄하는 axiomatic quantum field theory를 만들 수 있는지?'라는 새로운 문제가 탄생한 셈이고, 이게 클레이 수학연구소에서 제안한 밀레니엄 문제 중 Yang-Mills 질량 간극 가설의 본질이겠지만. 여하간 한동안 물리의 논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감이 있었던 이 주제들이 요새 중력의 열역학과 관련해서 다시 조금씩 관심을 받는 느낌이다. 재규격화된 중력의 열역학적 기술이 von Neumann algebra로 어떻게 가능한지? 가 대표적이다. 일단 von Neumann algebra 에서는 국소성(locality)이 양자장론에서 operator 사이의 관계로 기술된다는 점에 착안해서 물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algebra, 즉, 규격화가 가능한 상태에 작용하여 다른 상태를 만들 때 그 상태 역시 규격화가 가능한 local operator들의 집합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를 더 이어가면, 서로 다른 두 영역 사이의 강한 correlation은 발산하는 entropy로 해석할 수 있으며, Newton 상수를 유한하게 잡으면서 규격화된 entropy를 얻는 것까지도 기술할 수 있다. 아직 물리적인 해석이 아주 명확하지는 않지만. 특히나 operator들을 cyclic/separating state에 작용해서 operator와 상태 사이의 대응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데, 이건 conformal field theory에서도 자주 이야기되는 것들이다. Operator들이 '행렬'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n차원의 Hilbert 공간에 작용할 경우 operator는 일반적으로 n^2차원을 가지게 되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복사된 Hilbert 공간들 사이의 얽힌 상태에 대응될 수 있다.

     나도 2022년 하반기에 관심을 가져서 논문을 쓴 다음 잊고 있었는데, 그동안 생각 밖으로 많은 review나 논문이 계속 나와주고 있어서 다시 조금씩 생각해 볼까 하는 중이다. 당장 8월만 해도

    J. Sorce, Bootstrap 2024: Lectures on "The algebraic approach: when, how, and why?"
    2408.07994 [hep-th]
    https://inspirehep.net/literature/2818261

    J. van der Heijden, E. Verlinde, An Operator Algebraic Approach To Black Hole Information
    2408.00071 [hep-th]
    https://inspirehep.net/literature/2813777

    두 글들이 나와서 간단히 읽어보았다. 특히나 van der Heijden와 Verlinde 두 분의 논문 같은 경우 상당히 많은 부분이 구체적으로 적혀있어서 생각이 조금은 정리되는 느낌이다. 지금도 다소 혼란스러운 것들이 있긴 하지만.. 

     예전에는 논문을 읽은 다음 잘 정리되지 않는 느낌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갑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구는 뭔가를 다 배운 다음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생기는 일인데, 논문을 쓰는 사람마저도 최선을 다 하겠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리한 상태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포인트인 것 같다. 만약 완벽하게 정리된 상태로 논문을 쓸 수 있다면 우리는 고전역학을 Newton의 Principia로 공부하면 되고, 상대론과 양자역학 역시 원전 논문으로부터 배우면 되겠지만, 이건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저자가 논문을 쓸 당시 가졌던 잘못된 이해를 답습할 여지도 있다. 내가 접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단 내가 이해한 방식 대로 재구성하고 여기서 새로운 것이 어떤 것인지, 혹은 잘못 생각해서 고칠 것이 어떤 것인지를 따지면  이것도 꽤 좋은 논문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어떤 식으로든 작동하려면 논문을 쓴 분들과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한 것 같다. 다른 논문들을 읽는 것도 그 '뭔가'를 얻기 위해서..라는 면이 강하다. 사실 이 점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면서 점점 연구가 우주론을 떠나 formal 한 쪽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주론에 집중할 경우, island든 von Neumann algebra든, 우주론에 적용할 소재 정도의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연구 과정에서 당장 우주론적 상황에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은 넘기게 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중요하지 않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기도 하고, 또 당장 관련 없어 보이는 것이 진짜 관련이 없으라는 법도 없다 보니 계속 신경 쓰이고 아쉬운 것으로 남는다.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지금까지 한 연구들이 지엽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그 결과 단순한 적용이 아니라 내용 자체를 더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고, 그래서 점점 더 내용 자체를 보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다. 

     서울에 머물면서 교보문고를 가 봤는데, 토모나가 신이치로 선생의 책 Story of spin이 '스핀은 돈다'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샀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토모나가 선생이 처음 일본어로 책을 쓸 때 제목이 '스핀은 돈다'였고, 이게 미국에 번역되면서 Story of spin라는 제목으로 나온 것이다. 당시 물리학자들이 spin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여러가지를 설명하게 되면서 제대로 이해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교양책은 절대 아니다. 이 분이 쓰신 양자역학과 이어지는 면이 있기 때문에 그냥 바로 읽기에는 다소 매끄럽지 않기도 하고. 앞 이야기를 잘라먹고 갑자기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여하간 사람들이 뭔가를 처음 발견하면서 기존의 생각에서 어떻게 벗어나게 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혼란함과 삽질들이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는 상당히 잘 느낄 수 있다. 지금 양자역학 교과서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몇 줄 안에 식으로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내용도, 실제로 들여다보면 상당히 많은 속사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연구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정리하고 이해하는 작업이라는 면이 아주 잘 드러난다. 당연히 연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은지 당장은 잘 모르기 때문에 개념적인 혼란과 부정확한 실험들 안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험 결과에서 나오는 패턴을 어떤 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실제 답에 가까운 지도 사실 모른다. 그리고 이 상황은 당연히 현재진행형이다. 100년 정도 뒤에는 깔끔하게 정리될 것도 지금은 눈 감고 산길 헤매는 느낌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지라... 사실, 이해를 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있었던 혼란상들을 일일이 아는 것은 오히려 장애가 되기도 한다. 예전 사람의 선입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고, 많은 경우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스핀을 발견할 당시에는 분광학 혹은 다전자 원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주된 관심사였지만, 현재 그 이야기들은 화학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물리학자들은 보다 미시적인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당시에 몰랐던 spin의 다른 측면에 대해 더 알게 된 것도 있다보니 당시의 제한된 이해나 관심사에 묶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지금 풀어야 할 문제가 있고, 그것에 맞는 관심사가 따로 있다.  같은 spin이라도 취급하는 맥락이나 묘사가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해하는 방법이 꼭 발견하는 경로를 따를 필요도 없다. 어느 정도 이해가 쌓이면 결국 이런 것이었더라.. 하는 식으로 더 간단하게 본질을 볼 수 있는 묘사 방식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걸 다르게 이야기하면 같은 결론도 다른 방식으로 더 쉽게 얻을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것인데... 보통 교과서나 강의록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은 그런 것들을 모두 감안해서 나온 (적어도 지금까지는 가장 간단하면서 최대한의 이해를 담은 형태로) 정리된 것들이다. 가끔 교과서의 보수성 혹은 저자의 무지 때문에 새로운 이해 혹은 본질에 가까운 이해가 반영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연구하다 보면 결국 익히게 되기도 하고.. (물론 그걸 오랜 시간 동안 몰라서 삽질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복잡하게 생각한다거나..) 그렇게 보면 교과서의 설명도 반드시 따라야 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어느 정도 이해가 쌓이면 남이 해 놓은 것들에서 뭔가 불만족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다보면 내가 보기에 본질에 가깝게 보이거나 간명한 방식을 찾게 되고, 남이 안 했으면 내가 만들면 된다는 마인드가 생기게 되는데, 이게 잘하면 새로운 묘사 방식 하나를 더 찾아내는 방법이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새로운 접근 방식을 찾으면 이전에 안 보였던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