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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동안의 학회 일정도 다 끝나서 (미국 시각으로) 내일 출국할 일만 남았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익숙해 왔던 것과 가장 다른 문화를 가진 학회에 와본 셈인데, 그런 것 치고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연구면에서 겉핥기 내지는 이미 나온 이슈를 따라가는 것이 계속 이어지는 게 영 못마땅한 참에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참석한 학회였고,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현실적인 문제라면 수십 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깊이와 양이 주는 무게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일 것이다. 양자장론이야 오랜 시간 동안 고에너지 이론 물리학의 기본 언어 역할을 하면서 계속 다양한 방향으로 연구되어 왔고, 초끈이론도 여러 논란이 있음에도 입자물리를 위한 양자장론에 익숙해져 있을 때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양자중력의 성질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름 아이디어를 제시해 오면서 엄청나게 많은 연구들이 축적되어 온 상태이다. 그리고 선 굵어진 위튼 선생 같은(...) 인상을 주는 바파 선생 같은 경우 그 역사를 함께하고 만들어 온 분이다 보니 이 분의 시각에 맞는 주제가 선택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많은 것들을 자유자재로 생각하고 있다.. 는 인상이 훅 들어왔다. 그걸 보면서 이 분이 잡아내지 못한 것을 내가 볼 수 있을까?라는 느낌도 들었지만, 동시에 스티븐 와인버그 선생이 생각났다. 이 분 회고를 종종 보다 보면 연구를 시작할 무렵 지금 나와 비슷하게 (정도는 다르겠지만...) 그 당시 연구되던 것들로부터 뭔가 강한 무게감을 느끼지 않으셨을까 싶어서 그런데.. 예를 들어, 포닥에게 조언을 한 글
https://pubs.aip.org/physicstoday/article-abstract/60/3/58/977056/To-the-postdocs?redirectedFrom=fulltext
을 보면, 60년대까지 주류였던 S-matrix theory에서 복잡한 복소변수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셨던 이야기가 있다. 중력이나 장론 교과서에서 differential form을 이야기할 때도 뭔가 마지못해 한 듯한 인상을 준 것을 보면, 수학쪽으로 쑥 들어가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감을 다소 가지고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명한 글인 four golden lessons에서도 그 당시 상당히 세련된 수학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사실 그 당시 전성기였던 R. Penrose 선생의 연구를 보더라도 자연을 미분기하학의 언어로 기술하려고 하는 야심이 상당히 공공연하게 보이는 편이다) 일반상대론보다 물리적인 이해가 덜 되어 있던 입자물리에 끌린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여하간 포닥에게 하는 조언에 나오는 문구
So the moral of my tale is not to despair at the formidable difficulties that you face in getting started in today’s research.
는 지금 내가 은근히 듣고 싶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인 You’ll have a hard time, but you’ll do OK. 도 마찬가지. 물론 60년대 초 중반의 와인버그 선생 입장에서는 마침 군론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gauge invariance를 통해 기본적인 상호작용을 기술하려는 시도가 시작되는, 말하자면 기존의 무게감 있던 것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갈아탈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여지가 많지 않아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P. Woit 선생 블로그에 나온다..
https://www.math.columbia.edu/~woit/wordpress/?p=529
어떻게 보면, 휙휙 돌아가는 줄넘기에 끼어드는, 혹은 엄청난 속력으로 움직이는 기차나 놀이기구에 올라타려는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 안에 이미 올라타고 있는 사람이 미처 잡아내지 못한 뭔가를 내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시각으로 잡아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해 오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어쨌건 작게나마 존재하는 희망이라면, 그렇게 엄청난 진전이 있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게 지금까지의 생각을 따라가면 풀릴 문제인지, 아니면 아예 새로 판을 갈아야 할 문제인지도 매우 불확실하다. 그래서, 계속 생각을 다르게 하고 이미 있는 것도 다시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실 사람들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고, 그 결과 생기는 현상 중 하나가 이슈에 대한 주목도가 어느 정도 주기성을 가진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관심을 보여 온 KKLT, swampland 같은 주제들도 다 마찬가지인데, 한 때 어떤 이슈가 터져서 주목을 받았다가 또 한동안 식는다. 그런데 그렇게 잊혀지나 싶을 때 같은 주제를 다시 다른 각도로 보려는 시도가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어떨 때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덤빈 주제인데 이제서야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싶은 것들을 볼 때도 있다. 처음 사람들의 시각이 어떤 방향으로 고정되다가 (예를 들면 TeV scale을 얻는 것에만 집중한다거나...) 다시 이슈가 될 때는 비슷한 예제를 다른 방향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주제 하나를 골라서 일단 잘 숙지해 두고, 이걸 지금 입장에서 보면 어떤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 같다. 내가 마침 뭔가 생각해 내면 좋고 그게 여의치 않더라도 언젠가 또 이슈가 될 때 나름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회를 단순히 남들 하는 것 따라가면서 논문 하나 늘리는데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칼자루를 쥘 수 있도록 성장하는 것에 활용해야 할 것이고..
아주 좋은 생각을 멋지게 해내면 좋겠고, 충분히 운이 있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하려는 욕심을 과하게 내세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사실 그러면 아무것도 못하기 마련이라서... 그리고 상대적으로 익숙지 않은 입장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억세게 운이 좋아야 하기는 하지만.. ) 장점이 될 수 있기도 한데,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배워서 (지도교수의 위엄에 눌려서 때문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이야기해서일 수도 있고)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집단적으로 움직이느라 시각이 고정될 때 자유도를 가질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전문성과 회의적인 시각 사이의 길항 작용 같은 느낌이 든다. 다만, 무엇이 본질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하고, 그러면서 무조건 따라가지 않고 혼자서도 생각할 수 있는 능력도 같이 가져야 하다보니 해야 할 일이 두 배이기는 하다. 어떻게 보면 초끈이론이든, 혹은 그 안의 KKLT 같은 특정 주제든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 역시 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뭔가를 향하는 과정이지, 그것을 아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 의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슈가 반복되는 것도 그 이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보고 싶은 양자중력의 특성이 결국 잡고 싶은 것이고, 그것들을 의식하면서 교훈들을 하나씩 쌓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결국 모든 것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확보하는지로 돌아가는 것 같다. 이게 내가 가장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인데.. 쩝... -_-ㅋ
어떤 혁명적인 물리 이론이라도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기존의 것을 뒤엎는 작업도 무엇을 바꿔야 할지를 제대로 잡아낼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문제의 본질을 얼마나 잘 발견하는지일 것이다. 어떤 경우는 특정 주제에 대해 충분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어떤 것이 문제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도 있다. 반면 불완전해 보인다고 아예 처음부터 거부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 되지 못해 왔다. (까도 알고 까야지...) 그런데 딱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핵심을 적절히 발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는 하다. 말하자면 모두가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집어내야 할지는 지금도 각자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 상당히 많긴 한데,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배운 어떤 물리도 자연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대로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얕은 직관이나 신념에 부합하거나 책으로 오랜 시간 동안 배워 굳어진 것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보통 그런 경우 활동 반경을 능력보다 훨씬 줄이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당장 답이 없다고 손도 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아마 뭔가 중요한 발견을 해도 완벽하지 않을 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씩 찾아내는 것이 연구의 중요한 존재 가치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자꾸 벗어나서 구경꾼이 되거나 평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생각하고 깨지는 것이 더 가치가 있기는 하다. 물론 반대로 조자룡 헌창 쓰듯이 실적이라는 이름의 서류 작업을 하면서 연구를 한다고 내세우는 것도 안 될 일이고.. 적어도 개인적으로라도 생각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연구는 그 고민의 기회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오는 비행기 안에서 오펜하이머 영화를 봤는데, 보어 선생의 대사가 재미있다. '준비 없이 돌을 들추면 뱀을 만나기 마련이다'라고.. 영화에서야 핵무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만들어버린 상황을 은유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한 키워드이긴 하지만, 연구 입장에서 보아도 꽤 의미심장한 것 같다. 중요한 뭔가를 보려면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라야 가능하니까.. 문제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는 기준 자체도 애매하다는 거겠지만.. 계속 엉뚱한 돌만 들추면서 족족 나오는 뱀에 물리기만 할지, 아니면 문제의 핵심을 알 수 있는 모종의 계기를 잘 만나서 보물이 숨어있는 돌을 들출 수 있을지... 아무튼 적어도 지금 입장에서는 지식의 절대량 자체를 좀 더 늘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일단 귀국해서 볼 것들도 골라 놨고 하니 아쉬운대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초끈 이론 쪽은 F-theory를 좀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2008년인가 한번 (바파 선생에 의해)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현상론적인 면 그러니까 표준모형을 구현하는 등의 문제가 강조되었다면, swampland의 시각에서, 다시 말해서 양자중력의 어떤 면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아마 잘해 두면 나중에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