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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끝

dnrnf1 2024. 6. 12. 19:58

드디어 이번 학기 수업이 끝났다.. 성적 처리 등등까지 포함하면 다음주가 되어야 완전히 끝나지만. 다른 때에 비해서 이번 학기는 썩 유쾌한 학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다음 학기도 그다지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얼른 마무리 짓고 연구에 집중했으면 좋겠는데, 다음 학기에 새로 맡는 과목 강의록 만들 일도 있고 해서 금방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에서 하나를 좀 더 덧붙이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생각을 해 봐야겠는데 항상 이 단계에서 생각이 복잡해진다. 뭔가 이야기할만한 것이 나올 수 있을지 계속 논문도 보고 생각도 해야 하는데, 결과는 때때로 달라서, 어떤 경우는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의외로 이야기가 술술 나와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괜찮은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누군가가 이미 잘해 놓았다거나 남이 안 하기는 했는데 이걸 내세우기는 좀 뭔가 부족해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때 그때 다르긴 하지만, 논문까지 가지 않아도 들춰보고 생각했다는 것만으로도 얻는 것이 있으니까 아쉽기는 해도 시간 낭비는 아니다. 그래도 조금만 괜찮은 기회를 잡으면 사그라진 아이디어도 괜찮은 연구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계속 남게 된다.  계속 보지 않으면 잊어버리게 되는데 그것도 많이 아쉽고. 한 때 꽤 잘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당시에는 별 일을 못하다가 정작 쓸 때가 되니 잊어버린 것을 되살리느라 조바심 나는 일도 은근히 있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연구라는 것이 생산성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질이 좋기 힘들고, 그렇다고 아예 의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기 십상이라서,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물리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그곳이 아닌가 싶다. 남이 해 놓은 것은 시간을 얼마든지 들이면 어떻게든 이해하게 되지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꽤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알고 싶어하는 욕구나 내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고 싶은 욕구를 유지하는 것은 더 힘들기도 하고. 이걸 얼마나 잘 유지하면서 동시에 아집에 빠지지 않는지를 기준으로 주변을 보면 물리와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물리를 할만한 사람은 정말 극소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쨌건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는 세 가지 다른 접근을 일단 비교해 보고 있는데, 여기서 뭔가 뽑아내는 것이 그다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똑같이 중력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기하학의 관점과 양자역학적인 관점은 쉽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결국 한쪽 접근 방식에서 다른쪽 접근 방식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의 문제겠지만.. 왠지 전모를 알고 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나 실은 이미 여기저기 힌트가 널려있었는데 동시에 잡지 못했을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 같다는 느낌도 있다. 그럴 때는 사람과의 대화가 많이 아쉬워지기는 한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 있다고 해서 그 대화가 생산적이라는 보장도 없긴 하지만. 일단 아쉬운 대로 논문들이나 책과 간접 대화를 하기는 하는데... 예를 들어 논문을 막 읽거나 해서 이해한 듯 안 한 듯한 상태일 때 적절한 이야기를 통해서 아주 잘 이해할 수 있고 그걸 가지고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요새 보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괜찮은 정리로 

L. Susskind, Black Hole-String Correspondence
2110.12617 [hep-th]
https://inspirehep.net/literature/1951283

가 있는데, 90년대부터 가끔씩 불쑥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장 이 리뷰도 관련 주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논문

Y. Chen, J. Maldacena, E. Witten,
On the black hole/string transition
 JHEP 01 (2023) 103 2109.08563 [hep-th]
https://inspirehep.net/literature/1923692

이 막 나와서 관련된 배경을 랩미팅에서 설명하려고 쓴 것이고... 나도 이 주제와 그다지 인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찌 저찌 들추게 된 것을 보면... 어떨 때는 생각해야 할 주제라는 것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느낌도 든다. 물론 강제적으로 나는 여기까지 건들고 그 너머는 보지도 않겠다... 고 할 수도 있고 그게 지혜로운 삶의 방식일 수도 있지만 물리학자라는 것이 사람의 호기심이나 알고 싶은 욕구가 극대화된 직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꼭 바람직한가 하는 의심도 든다. 어느 순간은 쉽지 않고 힘들더라도 나에게 익숙한 것을 깨고 익숙지 않은 것을 접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데, 그걸 어느 정도 잘 해내는가도 연구자가 가지는 질을 높이는데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요새 많이 든다. 그런 것들이 죽어버리고 관성적으로 이미 아는 것 안에서 머무르는 것이 최소한 장려되거나 시스템적으로 강요되어서는 안 되는데, 자꾸 그런 쪽으로 가고 사람들도 너무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이번 학기에는 그런 광경을 과하게 많이 본 것이 어느 순간 강한 불쾌함으로 느껴지게 만든 것 같다. 어쨌든 연구에서 기본적인 방향을 정하는 것이 내 선택이라고 하지만 하다 보면 논리적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흐름이 있고, 내 방향을 멈추지 않고 유지하려면 내가 익숙하든 아니든 결국 갈 수밖에 없는 법인지라.. 그런 갈 수밖에 없는 길을 잘 여는 것에는 심리적인 요인과 물리적인 지식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심리적인 벽 때문에 못 가는 일도 있고, 반대로 정말 하고 싶은데 갖추어진 것이 별로 없어서 하나씩 쌓아가는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내가 쌓아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은 이미 저만치 가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다 해 놓는 것을 손 놓고 지켜봐야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가야 할 길을 가지 않는 것에는 심리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이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은 사실 어떻게든 갖출 수 있는 것 같다. 시간의 문제이고 인연의 문제겠지만, 적어도 이미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어쨌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남이 만든 것을 잘 따라가거나 자신의 방법을 만들어내거나.. 그런데 아무리 많이 알고 갖춰놓았더라도 내가 겁을 내는 순간 발이 엄청 무거워지기는 하더라.. 공부는 어떤 면에서는 그런 머뭇거림을 덜어주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