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rnf1 2024. 6. 6. 19:35

 논문을 보다 보면 이미 알려진 사실을 인용해서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설명을 하려고 하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Witten 선생 논문이 종종 그런 면을 보이는데, 이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어..라는 한두 마디가 더 있다. 어떤 경우는 단순하지만 처음 생각할 때 그 점을 눈치채면 좋을 것 같은 것도 있고, 어떤 경우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양한 방향으로 나름 깨달음을 주는 것도 있다. 물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논문이든 수업이든...)  배워서 실천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당히 많은 경우, 주변을 보면 이미 알려진 것에 대해 다소 무책임한 면을 보게 된다. 이미 알려져 있으니 내가 그걸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제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쪽에 거부감이 많이 든다. 일단 그 사실이 어떤 맥락에서 왔는지 어떤 한계가 있는지를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쓴다면 잘못 쓸 일이 많다. 실제로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지만 실은 부정확하거나 심지어 틀린 것들도 은근히 많다. 그리고 내가 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내가 쓰는 식이나 결과가 왜 쓸 수밖에 없는지, 그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내가 모든 동기와 조건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남의 것을 들고 오기 전에 본인이 스스로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모든 것이 이상적이지 않아서 이해해서 결과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보고 이해해야 할 일도 있고 시간의 한계가 있으니 모든 것을 처음부터 일일이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물리를 하고 있다면 궁극적으로는 내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내가 손을 댄 이상 주체는 나이기 때문에 내 공간을 줄이고 빠져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했으니까.. 나 대가가 했으니까.. 는 식으로 논리와 과정을 남에게 미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나 혼자서 이걸 생각할 여지는 없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건 물리를 한다는 것 혹은 연구를 한다는 것이 단순히 이미 있는 것을 얼마나 많이 아는지 측정하는 과정이 아니라 아는 것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새로운 것을 알아낼 수 있는가에 궁극적인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걸 가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건 정말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겠다. 존재하는 지식에 대해서는 이미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쌓여 있으니 자그마한 한두 문장 더 안다고 특별할 것이 없다. 잠시 사람들 사이에 똑똑해 보일 수는 있지만 진짜 제대로 아는 사람 앞에서 금방 밑천이 드러날것이고.. 알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는 척을 해서 명성이나 지위 돈... 같은 다른 것을 얻으려는 것이 목적인데, 그러려면 굳이 물리가 아니라 더 좋은 방법도 있지 않을까.. 물론 사람이 모이고 자리와 돈이 왔다 갔다 하는 이상 존재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내가 느끼는 거부감이라는 감정은 나름 오래 된 것 같다. 학생 때부터 그런 장면을 많이 보아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니 어떻게 보면 그런 면들이 부지불식간에 많이 퍼져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현명하고 합리적인 자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째 시간이 지나면서 더 거부감이 쌓여가는 것 같다. 스스로가 알아야 할 범위에 제한을 걸고 모르는 것을 새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굳이 '물리' 혹은 '이론 물리'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계속 아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5년 남짓한 시간에 누군가에게 배운 것에 그치려고 하고 작더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이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발견해야 하는 물리학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연구하는 사람이 안정적인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긴 하지만, 한 때 고생한 것에 대해 평생의 안녕을 보상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은 과한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교수라는 자리는 분명히 상당히 안정적인 직업이지만, 그런 안정성은 어디까지나 소신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 학생이나 포닥 때에는 다음 자리로 계속 이어가는 것이 급하다 보니 그런 소신을 지키는 것이 상당히 쉽지 않은 처지에 있기 쉽다. 그리고 소신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게 자신만의 아집이나 한 때 배운 것 안에서만 도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면 계속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서 깎이고 다듬어져야 한다. 어떻게 보면 교수가 된 것은 그런 것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인데 정작 그걸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놓는 것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 자리 자체가 능력에 대한 보상이 끝이 아니라 그 능력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더 해야 하는 자리이건만 과거의 고생이 미래에 해야 할 일을 쉽게 잊게 만드는 것 같다. 누릴 것만 생각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세습만으로 모든 권리가 당연하 다는 듯이 가지는 귀족과 같은 것인데, 그건 결국 자신이 누리는 안정성이 가지는 정당성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행동 같다. 세상이 점점 여유가 없어지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허용되는 것은 더 힘들 것이고, 어쩌면 어느 순간 내가 잘못한 것 이상의 안 좋은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긴 한데 또 '현실적으로' 소신을 지키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넘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 쉬운 것도 또 다른 사실인지라... 그래서 어떨 때는 외로워지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세상에 내가 내 원칙을 지켜도 곤란하지 않을 장소가 존재하기나 할까...? 그런 곳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것 같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나도 얼마나 '타락하지 않고' 더 알고 생각하는 것에 목말라 할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쉽지 않고 제대로 하는 것은 더 힘들지만 제대로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으니까... 다른 유혹이 강한 것은 둘째 치고, 어느 순간 내가 추구하는 것이 알아내는 것인지 그걸 가지고 어떤 지위를 누리는 것인지 스스로 분간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연구하면서 뭔가 좋은 이야깃거리가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잘 생각이 안나서 한번 넋두리 삼아 적어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장래의 인생까지 생각하면 진지하게 고민해 볼 만한 문제이기도 해서... 문제는 나도 답을 잘 모르는 건 둘째 치고 실마리도 안 잡힌다는 것.. 물리보다 더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