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버리기
논문 쓰는 중.. 일단 내용은 채우고 Introduction 쓰는 중인데, 논문 쓸 때마다 Introduction 부분이 진행이 가장 느리다. 글 쓰는 문제도 있지만 이왕 쓰는 김에 이것저것 생각하고 정리하게 되다 보니 항상 그렇게 된다. 참고 문헌 찾거나 하다 못해 영어 표현 찾는 와중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논문들 보는 맛도 있고.
연구를 하다 보면 항상 아주 깔끔하고 좋은 논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논문이 어떤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논문들 중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장엄한 드라마 보여주듯이 내지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보여주는 것들이 있고, 나도 그런 논문 좀 써 봤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아주 극단적으로 Albert Einstein의 일반상대론 논문이나 Stenven Weinberg의 표준 모형 논문 혹은 Juan Maldacena의 AdS/CFT 논문 같은 것을 쓰고 싶은 욕구는 아마도 이론물리학자라면 마음 한구석에나마 다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논문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미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아름다움의 정의를 다시 내리게 한다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 마치 중세에 수학적 아름다움을 기하학에서만 찾았지만 Newton 이후 수학적 아름다움의 범주가 해석학 쪽으로 넓혀졌듯이.. 그래서 완벽한 원 궤도를 설명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운동방정식으로 예측되는 과정이 아름답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하게 된 것 같이..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수학적 아름다움은 어떤 면에서 결과론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수학의 입장에서 복소해석과 군론 사이에 미학적인 우열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물리학자라는 한정된 입장에서는 자연을 설명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실제 자연을 최대한 잘 기술하는 것으로 판명 난 것을 '아름답다'라고 이야기하는 쪽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리고 실제로 이론물리학자들이 하는 일들의 상당수는, 어떤 면에서 진흙탕 싸움에 가깝다. Kuhn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paradigm이 바뀌는 일은 수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특수한 사건이고 대체적으로는 정상과학을 계속 뒷받침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해석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논문을 쓰는 과정이 지저분하고 꼬인 뭔가를 최대한 설득력 있게 풀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아름답고 장엄한 일을 꿈꾼다고 지저분한 일을 피한다면 웬만큼 머리가 좋지 않은 이상 그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할 가능성은 오히려 떨어지게 된다. 언뜻 보면 왜 하는지 모르는 노가다 같은 작업 같지만 계속 생각하고 계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감각이 생기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굳이 이야기하면 친해지는 혹은 익숙해지는 (조금 나쁘게 말하면 세뇌되는) 과정 같은 느낌이다. 어떻게 표현하든, 그런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그렇게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원하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으로 향하는 길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 길이 아닐 수도 있다. 연구는 모든 것이 불확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확실하다면 누군가가 이미 답을 구해놓았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라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 점을 느끼는 경우가 '정성적인 설명'을 할 때이다. 모든 것을 깔끔하게 보여주는 간단하고 직관적인 설명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본능이기도 하고 복잡한 계산을 하지 않고도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예측하는, 삼국지의 제갈량 같은 모습을 꿈꾸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실제 역사의 제갈량과 비교해도 명확해 지지만, 신묘한 능력이라는 것이 앉아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좋은 직관은 많은 경우 상당히 많은 삽질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리라는 것이 10을 투자하면 1이 겨우 건져지는 구조라서, 처음 할 때는 뭔가 제자리 걸음하고 있는 느낌인데, 이게 계속 시간을 들여 옆에 두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아주 가끔 뭔가가 보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게 좀 더 쌓이면 한참 안보던 것도 다시 볼 때 아주 잘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래서 틀리고 망하는 것을 너무 무서워해도 안되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고쳐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떤 면에서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낭비적으로 보여서,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면도 있는 것 같다. 나보다 딱히 잘난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내 주변 사람이 잘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더 그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다 보면 틀린 이야기를 할 것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고, 기약 없는 뭔가에 시간을 계속 들여 매달리는 것이 정말 좋은 결과를 준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성적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내가 누군가에게 듣기만 하고 깨달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점이다. 물론 머리가 좋다면 그걸 잘 기억해서 이야기하고 그걸 가지고 직관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들어가면 본인이 직접 뭔가를 해 보지 않는 이상 대체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언뜻 이해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진짜 이해하고 있는 것과 반드시 같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직접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이야기했다는 시점에서 '남이 이미 한 것'이라는 꼬리표는 달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단순히 남보다 몇 년 더 알았다는 것은 그저 운이 좋아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보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내가 구체적으로 뭔가를 하지 못하는 한. 실제로 듣기만 했을 때에는 그럴듯해 보여도 직접 계산하면서 이게 어떻게 대응되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를 복기해 보면 대체적으로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이걸 확인하는 좋은 방법은 같은 과정을 거쳤을 때 내가 처음 이걸 생각해 낼 수 있을지? 혹은 정확하게 그것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많은 선학들이 이론물리를 할 때 '겉멋'에 드는 것을 많이 경계하지 않았나 싶다. 빨리 진도를 나가고 남들이 안보는 것 같은 책을 보는 것으로 경쟁하는 것은 학생 시절부터 숱하게 보아 왔지만 그래서 읽은 내용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혹은 책의 내용이 처음 발견된 시점에 내가 있었다면 비슷한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지 라는 물음에 긍정적이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충분한 양의 지식은 중요하고 일찍 배워서 익숙한 것은 분명 중요한 이점이지만 모든 것은 '연구를 통해서 작은 것이라도 다른 사람이 안 한 뭔가를 해서 보여줘야 한다'는 궁극적으로 내가 실제 해야 할 일에 대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냥 자리 잡고 아무것도 안하겠다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그런데 물리를 그만두고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뭔가 물리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 정직하게 돈 벌게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 이게 안되면 결국 단순히 멋을 부리고 남이 이미 해 놓은 것을 등에 업고 자기 자랑을 하는 것 밖에 되지 않게 된다. 물론 빨리 이해하고 일찍 뭔가를 해서 아주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안된다면 한두 가지 부족하다면 다 거기서 거기인 면도 있고.
어떻게 보면 과학과 관련된 책이나 기사에서마저 그런 것들이 간과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내용은 과학이지만 밑에 깔린 생각은 전혀 과학이 아닌 것 같가도 해야 하나... 가장 불편한 것은 누군가 권위자의 말을 인용하기만 하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설명을 해주지 않는 것들을 볼 때이다. 권위에 의존해서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으니 이게 맞다고 주장하는 것도 좀 그렇다. 같은 사실을 가지고도 많은 '권위자'의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숱하다는 면을 생각해 보면 그런 식의 서술은 나도 모르는 뭔가에 대한 답을 그냥 정해 놓고 그걸 뒷받침하기 위해 내 논리도 아니고 권위자의 논리도 아닌 권위자의 말 한마디만을 따서 이용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과정은 필요 없이 도박사처럼 대박만 터뜨리면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기도 한다. 실제로 연구들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는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고는 있기 힘든데도... 게다가 연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다 제대로 알고 생각하는 것도 아닌지라... 과학자 혹은 연구에 대한 과한 환상이 아주 좋지 않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모두 사람 사는 동네라서 바보 같은 짓을 하기도 하고, 계속 비슷한 사람들과 지내다가 시야가 좁아지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보면 과학자도 당연히 이익집단인 데다가 연구비나 교수 자리 같은 것들까지 얽히다 보면 정치적인 행동도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한두 사람 말의 권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배경을 이해하고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어쩌면 물리가 굳이 물리학자가 되지 않을 사람에게도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상대론이나 양자역학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는데 책에 실린 이야기 한두 마디 이해도 못한 채로 해 본다고 특별히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걸 가지고 무엇은 하는가에 따라 사기 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어떤 과정이 결론을 위해 필요한가? 를 묻는 것 자체를 훈련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