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8
보름 전에 쓴 논문은 논문 자체의 질 문제를 떠나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괜찮았던 것 같다. 특히나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논문을 써 본 사람들과 비교적 생산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좀 더 상황을 잘 정리하게 되었던 것도 있었고, 처음 썼을 때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은 부분을 보충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속 논문을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간단히 계산해 보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기사 quintessence라는 게 새로운 주제도 아닌데 그렇게 쉽게 보일 정도면 누군가가 벌써 했겠지... 그래도 내가 생각한 방법대로 분석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일단 정리 중이다. 하다 보면 또 다른 뭔가를 찾아낼지 모르고...
요새 느낀 것이 혼자 놀기에 특화된(...) 나도 결국 누군가와의 대화를 많이 원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고.. 내 욕구불만을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물리에 진지한 사람 내지는 이론물리와 관련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사람과 이야기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도 전자 같은 경우는 학생 중에 상당히 많아서 어느 정도 채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건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희망적인 것 같다. 보통 물리 교사에게 연구가 가능할 정도의 높은 수준의 물리 지식 내지는 사고 회로가 요구되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임용 시험만 붙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복잡한 계산 혹은 머리 아픈 생각을 하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다 보면 지식 혹은 생각하는 능력보다는 운이나 인간관계에 더 마음이 가는 것도 인지 상정인지라. 그걸 뭐라고 하기도 참 그런 게, 사실 이미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물리 연구를 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는 사람 중에서도 그러니까 교수나 연구원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그냥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서 내가 원칙을 이야기해 봤자 공허한 메아리 이상도 아닐 것이고. 그저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충실히 하고 물리에 진지하고 싶은 학생들이 있으면 최대한 도와주면 될 일이 아닐까 싶다. 사실 그렇게 살아도 아주 충분히 바빠서 다른 쪽은 눈길 줄 시간조차 없다. 당장 지금도 신학기라서 수업 준비도 해야 되지만 논문도 써야 한다. 누군가 먼저 쓸 수도 있어서 서둘러야 하지만 허접하게 쓸 수도 없다 보니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신경 써야 한다. 그리고 아마 그 사이에 이미 쓴 논문에 대해 referee report가 날아올 텐데 그것 가지고도 한동안 골머리 썩어야 한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하고 물리 자체에 애착을 가지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처음 물리에 관심을 가졌던 시기 혹은 학부생 때가 생각나서 외면하기는 싫어진다. 혼자서 뭔가를 계속 이해하려고 하다 보면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는 웬만하면 책에 나오는 것 중 중요한 것들 (적어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범위 안) 은 혼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게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생각하고 직접 계산하는 수고는 해야 한다.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고, 이게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지, 현재 이걸 다루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등등을 짧은 시간 안에 혼자서 모두 파악하는 것은 힘들다는 것이다. (불가능하지 않더라도 비효율적일 수 있다.) 교수가 해 줄 수 있는 (좀 더 강하게 말하면 해 줘야 하는) 것이 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그것을 원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원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주고 싶은 건, 학부생 때 그런 쪽에 너무 목이 말랐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내가 똑똑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지만, 세상에 똑똑한 사람만 물리 연구에 필요하다면 물리를 교육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다 못해 아주 좋은 대학에서만 학생을 길러낸다고 해도, 그곳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닐 건데, 이 사람들이 모두 그 소수의 대학 혹은 연구 기관에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결국 소수만 뽑아서 교육시킨다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 모든 이론물리 박사들이 자신의 전공에 맞는 직업을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학위 과정에서는 전공에 맞는 직업 교육을 한다는 것이 가정되어 있고, 여기에 투입되는 시간은 절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짧지 않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교육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있다면 천재 정도로 똑똑하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 심지어 그 천재들도 놓친 뭔가를 할 수도 있도록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전재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긴 한데, 이론물리 하는 사람과의 대화라는 것은 교수 되면서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해서 많이 아쉽다. 일단 수업 같은 것이 있으니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제약이 있다. 요새는 코로나야 학과장 일이야 해서 더 발이 묶인 감도 있다. 또 단순히 이론물리연구를 직업으로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말로 연구를 하고 있는지 혹은 물리에 진지한지는 또 다른 문제다. 예를 들어, 겉으로는 활발히 연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생각은 없고 나를 이용해서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물만을 챙기고 싶은 사람과 이야기해 봐도 그다지 즐겁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는 물리학자라기보다는 학문을 내세우면서 사업'만' 하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진짜 사업가와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분명한 질적 차이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만큼 호기심이 있으면서 내 이야기도 들어주고 자신의 물리를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특히나 내 연구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 혹은 하다못해 요새 어떤 물리를 생각하고 있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내 인복이 없는 탓인지 몰라도 그런 사람은 한국 사람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다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내가 현상론에서 이론 쪽으로 기울면서 좋았던 것 중 하나는 그런 분들이 좀 더 늘어났다는 점일지도. 그렇게 보면 내가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학생이든 교수든 상관없이 물리 자체를 좀 더 이해하고 싶은 사람 정도로 요약되는 것 같다. 사실 구체적인 연구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일종의 '같은 문화권'에 있는 사람과 같아서 좀 더 공감할 수 있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구석이 생기는 것 같다. 완전히 생각이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뭔가 편한 구석이 생긴다고 해야 하나..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여러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분명히 연구 시간이 줄기는 했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고. 어떨 때는 이야기하고 나면 뭔가 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나보다 경험이 적은데도 더 근사한 생각을 하거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부끄러워서라도 채워 넣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래도 명색이 교수인데 십수 년 전 공부한 것만 잡고 있고 단지 그걸 우려먹기만 한다면 그게 좋은 것일까 싶다. 학생이나 포닥 때는 연구 시간이 엄청 많이 주어지지만 경험도 없고 때로는 추천서 같은 것 때문에 제약을 받기도 한다. 사실 교수가 된다고 반드시 그게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박사 과정 학생을 기른다고 한다면 같이 연구할 때 나도 막 헤맬 수밖에 없는 아주 위험한 시도를 하는 것이 도의적으로 좀 그렇다. 실패 위험은 둘째 치고, 내 지도 학생이 박사 학위를 받는 다음에도 계속 연구를 하려면 내가 추천서 써서 보내줘야 하는데, 내가 원래 하던 것과 영 다른 것만 한다면 당연히 고용하는 쪽에서는 그 학생이 안정적인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는지라. (사실 나도 약간은 비슷한 경험이 있기도 하다.) 내 직장에서는 내 전공으로 박사학위 학생을 기르기가 아주 힘든데, 그게 내 연구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내가 서툰 것도 손댈 수 있다는 면에서. 그리고 연구를 해도 딱 내가 가지고 있는 만큼 보여주고 그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느낌이라 깔끔하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좀 더 늘었으면 좋겠지만..) 학생을 키우지 않으니 연구비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해서 따로 연구비 신청도 안 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시간이야 부족해졌지만 연구의 자유도라는 면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시간 부족한 건 계속 걸리는 문제인데... 그리고 어떻게든 아주 좋은 논문을 쓰고 싶은데 그걸 위해서라도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