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7
논문들을 보다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80년대까지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말하자면 같은 주제가 내 인생에 해당하는 세월 이상만큼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새로 올라오는 논문을 볼 때 '아직도 이 문제를 계속 이야기하네?'는 생각이 들다가도 '40년 넘게 이야기되었는데도 실마리를 못 잡는 것은 왜일까' 혹은 '그렇게 오래되어 이야기될 대로 이야기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것이 새로운 것일까'라는 의문도 든다.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한 선배 물리학자들의 반응도 사람마다 달라서, '옛날에 이미 정리된 것이고 지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유행에 따른 사소한 변주 혹은 잊혀진 것을 새삼스럽게 끄집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예전에는 특정 시각에 매몰되어 있어서 강조되지 않은 것을 다시 보다가 발굴한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학생 때는 그런 냉온차가 상당히 당혹스러웠는데, 점점 머리가 굵어지다 보니 그건 상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근거 없이 나보다 경험 많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결과랄까... 당장 내가 관심 있는 것도 아니라 가물가물한 것, 혹은 부분적인 경험에 의해 의존한 인상 만으로 모든 것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그런 경우 자신의 물리에 대한 관점에 의존하여 첫인상을 이야기해 주거나 신뢰하는 집단 내지는 대가의 판단을 그대로 읽어주는 경우가 꽤 많다. 일단 누가 나에게 물어봐도 비슷할 것이고. 그래서 내가 얻은 결론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흥미가 생긴다면 일단 한 번 읽어보고 필요한 것을 직접 계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판단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듯이 알고 싶은 사람이 알아봐야 하는 것이고, 내가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았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건 내가 책임질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된 방향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믿더라도 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정말 좋겠고 그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편파적이고 부분적인 지식과 시각에 의존해서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확률로 바보짓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맞는 말을 하지만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읊는 것과 틀리더라도 내가 나름대로의 논리나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장은 몰라도 나중에 큰 차이를 주는 것 같다. 후자의 경우 내가 내 시각을 고집만 하지 않고 제대로 고칠 수만 있다면 (아니면 운좋게 그 내 시각이 정답이라면) 오히려 전자보다 더 낫게 될 확률이 높다. 예전에 Planck 선생이 흑체복사를 연구하게 된 계기를 들었을 때 배운 일인데, 사실 Planck 선생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틀린 생각으로 흑체복사를 건드렸다. Entropy 개념을 부정하고 비가역성을 미시적인 원인에서 찾으려고 했다나.
조금 더 되짚어 보면 Planck 선생은 박사학위를 딸 때부터 Clausius 등이 처음 이야기한 열역학 제2법칙이 꽤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그 당시 Boltzmann 선생이 통계역학적인 방법으로 entropy를 이야기한 것은 poincare recurrence theorem 등에 의하여 공격받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Maxwell의 도깨비 같은 여러 paradox를 접한 상황인지라 불연속적인 입자로 이루어진 계에서는 미시적인 비가역성이 없는 한 비가역성은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던 듯하다. 그러다 연속적인 매질이 있는 상황에서 비가역성이 있는지를 묻게 되는데, 그걸 볼 수 있는 예제로 Planck 선생은 전자기복사를 택해서 연구하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전자기 상호작용은 기본적으로 time reversal symmetry를 가지고 있는 계라서, 상황이 막 크게 다르지 않고, 실제로 Planck 선생이 이 부분을 파 들어가는 중에 Boltzmann 선생이 이 점을 지적하는 논문을 쓰셔서 Planck 선생은 비가역성의 원인을 미시적인 것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포기하게 되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 Boltzmann선생 논문이 나름 의미심장한데, 전자기 상호작용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입자의 통계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암시했다나.. 그 직후 Planck 선생이 흑체 복사를 광자로 취급하는 시도를 하시게 되었고 결과는 아주 잘 알려진 대로.
이전에 여기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햇병아리 물리학자들은 야생마 같다.. 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식으로 길들여지는지에 따라 최고의 명마가 될 수도 있고 평범한 말만도 못 하게 될 수 있는 것이 야생마라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만.. 보통 그런 경우는 재능 혹은 노력이 보통 이상인 경우라서 그것들이 굳어진 결과 생각하는 방식이 완고하다. 그게 꼭 여러 사람들의 생각과 같지 않은 경우도 꽤 있고. 필요한 것은 자기 고집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언제 그 고집을 밀고 나갈지, 언제 유연하게 그걸 수정할지의 타이밍을 판단하는 능력인데, 이건 누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깎이고 남는 부분이 생기고 하는 결과이다. 그리고 그렇게 상당히 다듬어졌더라도 언제든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는 여지가 항상 남아 있기도 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한 번에 해 낼 수 있다고 믿고 가만히 있는 게 꽤 위험하다. 한 번에 답을 찾는 것은 대가들도 힘든데 스스로의 경험을 죽여가면서 틀린 소리만 하지 않는다면 혹은 맞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옆에서 그 사람의 말을 흉내 낸다고 갑자기 모든 답이 갑자기 떠오를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오만이다. 일단 계속 움직이면서 경험을 늘려나가는 것이 그나마 나은 방법인 것 같다. 이게 상당히 힘들고 그렇게까지 안 해도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유혹 내지는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게 될 때 가지는 조바심 같은 것들이 상당히 강해서 문제지..
한편으로 보면 연구 동력이 너무 쉽게 '고갈'되는 경우도 꽤 많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상기하게 되는 것이 내가 내 연구 주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알려고 해야 하고 그게 내가 뭔가 할 일을 당장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뭔가 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다는 것. 똑같이 아무 결과가 안 나온다고 해도 머릿속에 뭔가 들어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고, 계속 궁금해한다면 나중에 그 주제가 다시 중요한 문제가 될 때 적어도 한마디라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은 역시 사람이 얼마나 목이 마른 지..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건 아니고.. 작년 여름에 String pheno 학회에서 사람들이 자꾸 이야기해서 이게 옛날부터 들리던 소리인데 왜 그렇게 난리지?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궁금해져서 논문들 찾아 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