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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감상 + 잡상들

dnrnf1 2024. 1. 1. 18:40

이제 2024년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매년 그렇듯이 새해 실감도 잘 안 난다. 1월에 피곤할 여러 일들이 있을 예정이라서 더더욱....

 1. 어느 정도 논문을 쓰고 나면 시간을 좀 내서 당장 논문 쓰는 것과는 별개로 알아두어야 할 것들을 공부하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12월 중순부터 논문 하나를 골라 식들은 최대한 유도해 보고 앞으로 공부해 봄 직한 것들을 담아 두는 식으로 나름대로 해부해 보았다. 

 S. Kachru, M. Kim, L. McAllister, M. Zimet, 
 de Sitter vacua from ten dimensions
JHEP 12 (2021) 111 1908.04788 [hep-th]
https://inspirehep.net/literature/1749542

 꽤 시간이 지난(?) 논문이긴 하지만, 공부해 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논문이 나왔던 당시로 돌아가 보면 de Sitter swampland conjecture가 나오면서 KKLT model과 같은 string realization들에 대한 재검토 분위기가 있었다.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KKLT의 여러 요소들, 즉 flux compactification, non-perturbative effect, uplift 들을 4차원 유효 이론에서 따로 다루는 것이 정말 괜찮은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좀 더 들여다 보면, 이야기는 10차원 supergravity(혹은 초끈이론)를  4차원 supergravity에서 controllable하게 다루기 위해서 flux compactification를 쓰는 것에서 시작한다. 특히, Giddings-Kachru-Polchinski가 했듯이 internal geometry는 flux의 backreaction에 의해 warped 된 Calabi-Yau manifold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 한 부분인 Klebanov-Strassler throat)를 염두에 두고 있다. 여기서 dilaton이나 complex structure moduli 들을 안정시키고 나면 Kahler moduli에 의존하지 않는 superpotential 항이 나온다. 이것만 가지고 potential을 만들면 no-scale structure 때문에 Kahler moduli 들이 특정 값에 안정화되지는 않지만, non-perturbative effect까지 고려하면 Kahler moduli들이 anti-de Sitter에 안정화된다.  덧붙여 throat 끝에 backreaction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소수의 anti-D3 brane들을 살포시 얹어서 초대칭을 깨면 (throat의 특성 상 초대칭이 깨지는 정도는 redshift로 인해 non-perturbative effect만큼 충분히 작을 수 있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metastable de Sitter를 만들 수 있다. 엄밀히 이야기해서 각 요소들은 10차원을 compactification 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발생하지만, 실제 KKLT 논문에서는 non-perturbative effect와 uplift를 flux compactification에 부수적으로 붙는 작은 보정으로 여기고 각 요소에 해당하는 개별적인 4차원 이론들을 단순히 조합했기 떄문에, 과연 이게 정말 문제가 없는가..라는 의문을 사람들이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10차원 관점에서 여러 요소들을 동시에 다루고 compactification은 나중에 해 보려는 시도들이 꽤 있었는데, Kachru-Kim-McAllister-Zimet의 논문은 그중에서 잘 정리되고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특히 당시 사람들이 집중했던 것은 non-perturbative effect를 좀 더 체계적으로 다루는 것이었다. 기존에는 flux에 의한 superpotential에 단순히 non-perturbative effect에 의한 superpotential항을 더했다면, 2019년 시점에서는 10차원의 compactification으로부터 두 효과를 동시에 가지는 superpotential을 얻음으로써 기존 방식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이는 일들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non-perturbative effect를 구현하는 모형으로 D7 brane이 4-cycle을 감고 있을 때 나오는, gauge coupling이 안정화하고 싶은 Kahler moduli에 의해 주어지는 4차원 Yang-Mills theory를 생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4차원 이론에서 gaugino condensation이 구현되면 원하는 non-perturbative effect가 나온다. 이미 internal geometry가 Calabi-Yau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spinor들을 제대로 기술하려면 generalized complex geometry가 필요해서, 이번에 논문 공부하는 김에 이 부분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동안 연구하면서 너무 fermion을 다루어보지 않은 게 걸리기도 했고. 

 사실 당시에는 초끈 현상론의 여러 면을 살펴보는 것을 좀 더 먼 뒤의 일로 생각해서 담아두기만 하고 당장 보지 않은 면이 있었다. 일단 당장 이해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초끈 쪽으로 깊이 들어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고 했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미루면 평생 못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해서, 아예 손을 안 대면 모르겠지만 어차피 계속 보게 될 것이라면 다소 엉성하더라도 이해를 시작해 보는 것이 좋다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도 읽는 논문이 너무 불친절하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거나 식 유도할 때 어떻게 손댈지 모르는 일이 생겨 피상적으로 그런 게 있구나 하고 넘어가다가 잊어버릴 수 있는 문제가 있다. 논문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모두 친절히 설명하는 것은 아닌지라... 그래서 어느 정도 식 유도가 스스로 가능하고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가 체계적인 논문을 고를 필요가 있는데, Kachru-Kim-McAllister-Zimet가 그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했다. 모자라는 부분은 연구하면서 더 reference 찾고 계산해 보고 하다 보면 채워질 것이고.. 당장 뭘 해야 할지가 생각나는 것은 아니지만 꼭 그런 목적으로 논문을 볼 필요도 없는 게 사실이다. 이게 언제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거 다 제쳐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어느 정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2. 학부생 시절에 전공 과목들 못지않게 관심을 가졌던 강의가 과학사 강의였다. 이걸 지금 연구하는 입장에서 다시 보니까 여러 가지로 다시 배우는 면이 있는 것 같다. 특히 지금까지 보아 오고 겪어 온 일과 연결지어 보면 더더욱 그러한데.. 단순히 예전에 그랬구나 하고 지나갈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연구하면서 당사자 입장에서 계속 보게 될 일들이다 보니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할 때 참고하기 좋은 면도 있다. 요새는 아이러니라는 것에 관심이 간다. 이론 물리를 하는 입장에서 자연의 근원적인 면을 묻는 것에 최우선 가치를 두기 마련이지만, 시간이 흐른 뒤 보면, 항상 근원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가장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니게 됨을 발견하게 된다. 혹은 근원적인 것을 해야 한다고 강하게 의식한 결과 이미 지나간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게 되어 최전선에서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물론 최전선이 항상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잊혀진 옛이야기가 오히려 좋은 결과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그리고 그것도 아이러니의 하나에 들어가지만, 그 경우도 결국 현재의 필요나 현재의 질문에 의해 재발굴되는 것이라서 예전의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있으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사람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푸는 답일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기 마련이기도 하다. 아주 극단적인 비유를 하자면 물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정량적으로 잘 설명하고 논리가 모두 맞아야 한다는 것에 너무 매몰되어서 고전역학이나 전자기 문제는 잘 푸는데 정작 양자역학을 제대로 못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사실 여기에도 함정이 숨어 있는 게, 양자역학이 현재도 완성된 것이 아닌 만큼, 그런 부적응자의 시각이 어떤 식으로든 현재 양자역학이 가지는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될 가능성이 0이 아닌 면도 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면 모르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13세기 유럽에 '대학'이라는 것이 생긴 직후의 이야기이가 꽤 재미있다. 중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세속적인 학문의 실용적 수요가 생기고 동로마나 아랍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그리스 학문에 다시 주목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신앙과 이성의 대립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흔히 이걸 르네상스 이후 갈릴레이 시절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생각보다 그전부터 있었던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서 발견한 아이러니는  이성의 추구가 꼭 자연을 이해하는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좀 더 살펴보면... 중세 시대의 안정화는 대도시의 성장을 가져왔고, 그곳에 외부의 지식인들이 모여서 외부의 학생을 받아 교육을 하는 일들이 이루어져 왔다. 처음에는 한 명의 지식인 즉 'master'가 있으면 이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학생들이 붙어서 도제식으로 뭔가를 배우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 규모가 커지면서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생긴다. 이들은 외지인들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자위 수단이 필요했고, 이 사람이 진짜 제대로 된 학자인지, 혹은 학생이 될 자격이 있는지 검증할 system도 필요했고.. 그런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의 집단인 guild체제를 본받아 대집단을 만든 것이 대학의 근원이다. 그리고 당시 철학은 가장 체계가 잘 갖추어지고 많은 것이 남아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대학 안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학이 공존하면서 긴장 관계가 생기게 된다. 사실, 신학 입장에서도 무조건 아리스토텔레스를 이교도의 철학이라고 누르지는 않았다. 실용적인 면 혹은 논리를 공유할 수 있는 면이 매력적이었던 것이 이유였는데, 오히려 기독교적 세계관에 포함시키거나 공존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그러다가 철학자들 사이에 급진파가 나타나서 신학의 비이성적인 면을 공격하면서 금지령이 생기는 일이 생기는데, 이게 얼핏 보면 종교의 이성 탄압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는 게 재미있다. 일단 종교 입장에서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유용함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급진파를 억누르는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자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다. 당시 이성과 철학의 중재를 추구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부 주장은 금지령으로 묶였지만 결국 해제되었고, 아퀴나스는 성인 반열에 오른다. 무엇보다 과격파들의 이성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탄압을 피해 가거려는 혹은 급진파의 주장에 오히려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신의 전능함을 인정한다면 논리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도 가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상황을 가정하는가 하면, 뷰리당이나 옥스퍼드 머튼 칼리지 등이 주축이 되어서 이전에 정성적으로 이야기되던 것들을 수식으로 나타내는 등 보다 정량적인 표현을 하려고 하게 된다. 사실 등속운동이나 등가속운동에 대한 기본 개념은 이 와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수학은 철학과는 다른 기술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자연의 기술에 있어서 수학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안에는 단순히 이성과 신앙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자연의 기술 수단에 있어서 철학과 수학 혹은 기술 사이의 갈등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 갈등은 서구 지성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줄기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런 대립의 시기에 지난 것을 익숙하게 알고 그 시각을 견지하는 사람보다 논의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거나 설익은 사람이 기존의 시각에 얽매이지 않고 '무식하면 용감하다'를 실천했을 때 더 큰 진전을 이룬 경우도 매우 많다. 이 점은 지금 내 상황에서 시사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모종의 전제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그에 따른 치밀한 논리를 동원한 '합리적' 사고를 하는 똑똑한 사람은 어느 시대나 존재해 왔다. 문제는, 그 사고의 결과가 항상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반박이 힘들더라도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해답이 아니거나 원래 목적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주는 주장은 아주 많이 있어 왔다. 많은 경우, 이런 문제는 합리성이 작용하는 범위가 매우 지엽적이어서 근본적으로 해야 할 질문에 대해서는 특정 시각에 대한 과도한 믿음을 밀어붙이고 무시하는 일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다시 이야기해서 전제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거나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곳에서 나오는 논리가 치밀하더라도 문제점이 항상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야를 너무 좁혀서 주변에 잡히는 것만을 완벽하다고 착각하는 일이야 흔한데, 많은 경우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논리를 회피나 변명에 이용하는 일이 많은지라.. 그것이 정말 합리적인지에 대해 많이 회의를 가졌던 기억이 난다. 합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비합리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