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닫으며...
여기 오시는 분들께... 올해 며칠 남지 않았지만 좋은 마무리되시길..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매년 연말이 되면 느끼는 것이지만, 1년이 금방 지나간 것 같은데 되짚어 보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한편으로 보면 교수라는 직장 생활은 점점 안정되어 가는 것 같지만, 물리학자라는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점점 쉽지 않아 지는 것 같다. 처음 물리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많은 것을 내가 직접 이해하고 소화해서 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상상했다. 조금 더 기술적인 언어로 이야기하면, 전체적인 흐름을 읽고 필요한 문제를 던질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 욕심을 가진다면, 연구가 단순히 논문을 쓰는 일 이상의 무엇인가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고, 그것을 할 줄 아는 것이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논문을 쓰는 것이 더 이상 생존을 위한 행위가 아니게 된 상황에서 점점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것들이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단순히 지식적인 면 그러니까 이런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거나 논문에 무심히 이미 알려져 있는 식을 쓰는 정도가 아니라, 처음 아이디어가 나온 시점에서 내가 나름대로의 논리 구조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비슷한 생각이라도 해 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상적인 연구라면 궁극적으로 1) 내가 좀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어야 하고 2)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야 하며, 3) 그것이 단순한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학문 자체의 전체적인 이해의 흐름에 기여할 수 있는 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인정을 받는다거나 하는 것은 그다음의 부수적인 문제이다. 논문을 많이 쓰고 학회에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내가 뭔가를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부족한 것을 채우는 수단일 뿐이다. 아주 중요하고 필수적인 수단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내가 뭔가를 이해하는 과정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논문이든 학회든, 그 결과가 내 머릿속을 어떤 식으로 '채워주지' 않는다면 정말 공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구를 하다 보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 내 주관이 없으면 학자 자체의 정체성이 없는 것이지만, 내가 보는 관점만을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며 고집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면 자신의 가능성 역시 그만큼 제약받게 된다. 그래서 학회나 논문 등을 통해 접하는, 외부로부터 오는 '낯선 생각' 혹은 '금방 들어오지 않는 설명'을 어떻게 대하고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서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과 섞어내야 할지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내 생각을 단순한 나만의 생각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객관화'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학회에 많이 나간다고 하더라도 내 논문을 발표만 할 뿐이고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관심조차 없으면 사실 학회에 나가서 사교 활동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다. 아무리 넓은 물에 있다고 해도 내가 넓은 세상에 존재하는, 지금까지 익숙한 것과 다른 것을 제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혼자서 뭔가를 하는 것보다 오히려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또 이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대세라는 이유만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고 대가들이 좋다고 하니까 덩달아 중요하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논문을 쓰기도 하면 내가 뭔가 '앞서 나간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여기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면 마찬가지로 제대로 물리학자의 일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논문을 쓰니 실적이 생기고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으니 사람들 사이에 어울리기 좋을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떠들면 스스로가 중요한 일의 한 대열에 속해 있는 느낌 내지는 우월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표면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그치고 진짜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저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주제에 계속 끌려다니는 것인데, 지금 나에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상당히 강한 욕구이고, 특히 학계에서는 이것이 생존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기 마련이지만, 더 이상 생존 문제가 아닌 지금 입장에서 본다면 여기에 매달리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호의적인 반응을 받는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닐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관이 강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다른 '똑똑한 사람' 중 그 관점이나 물리적인 해석까지 인정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런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주관이 강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쉽게 거부감을 준다. 그래서 인정받는 것이 실제로 들여다보면 '제대로 된 생각은 내가 하고 실질적인 빈칸은 당신이 채우는' 것을 기대하는 정도이지, 같이 대등하게 주제를 찾고 방향을 고민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근본적인 시각이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면 사소한 일 몇 가지로 받는 칭찬이 실제로 인정받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단순히 계산만 열심히 해 주고 깊은 함의를 고민하는 일에 끼어들지 못해서 논문의 가장 핵심인 부분은 손도 대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나를 인정해 주는 것 같고 그래서 같이 일 하게 되더라도 그 일을 시킨 사람은 제대로 뭔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나를 이용하는데 '친절' 내지는 '합리적인 태도'를 '이용'하고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나는 이해하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은 내가 단순히 심부름만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저런 것들을 보고 겪다 보니 점점 논문을 혼자 쓰는 것을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분업 식으로 논문을 써서 여기까지는 내 할당량이니까 하지만 다른 부분은 관심도 없다...라고 하고 싶지는 않고, 이왕 논문을 쓴다면 그 주제에 대해서 내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고 그걸 가지고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를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하고 싶어서가 일단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그림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그 전체적인 그림은 논문을 쓰는 와중에서 새로 알게 된 것에 의해 어떻게 수정되어야 할지, 그리고 그걸 가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최대한 내가 판단해 보고 싶다. 아무래도 그런 과정이 서툴 수밖에 없고, 보기에 따라서는 아주 사소한 진전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일단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어떤 문제가 정말 어렵다고 할 때, 온갖 방법을 다 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점검하고, 특수한 상황으로 가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도 아니면 일일이 모든 상황을 다 따지고 쓸 수 있는 항을 다 확인해 본다. 그래도 안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풀었는지 찾아서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를 발견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면 웬만한 문제는 다 풀게 되는데, 그렇게 해도 끝까지 제대로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그런 문제는 대체적으로 좀 더 높은 차원의 이해가 있을 때 건드릴 수 있는 것인데, 초심자 입장에서는 당장 배운 것을 활용하기 급급하니 아주 먼 곳의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걸 덮고 넘어가느냐.. 학생 때 경험으로는 그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든 푼다면 그 높은 차원의 이해를 건드리는 계기가 되는 것이고, 끝까지 못 풀어도 적어도 내가 어디까지 알아서 어디까지 풀었는지를 명확히 해 두면 언젠가 또 생각이 나서 풀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게 당장 내일이면 정말 좋은 것이고, 며칠이든 몇 년이든 걸릴 수도 있지만 (그때까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ㅋ) 분명한 것은 아예 손도 대지 않고 그냥 덮는 것보다는 약간이나마 낫다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지금 연구하는 것도 학생 때 했던 그런 방법을 계속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히 내가 좀 더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누군가와의 깊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겠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즉 무엇을 알고 싶은지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기 단순히 관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어서, 많이 건지지 못한다. 사실 그 경우라면 나에게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다지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아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쉽게 설명할 의무가 있거나 모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쉽게 설명 들어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사람의 이기심 이전에, 이해라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스스로 뭔가 하기 전 까지는 정말 힘들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같은 주제라도 내가 뭔가 연결점이 될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좀 더 이해하게 되는 정도 혹은 논문으로 쓸 수 있을 가능성은 분명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긴 하더라도 솔직히 계속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남들이 이미 아는 것 몇 개 뒤늦게 겨우 이해해 놓고 기뻐하는 것은 영 아닌 것 같아서, 어떤 식으로든 좀 더 잘 이해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금 하는 식으로 계속하다가 언젠가 깨닫게 되면 다행이겠지만, 아무래도 모든 것을 혼자 하기에는 물리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만족스럽지 못하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이라도 지금까지 모르던 것을 줄이고 계속 뭔가 다른 것이 없나 생각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 몇 마디 듣는 것 만으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정도로 물리가 만만하지도 않고 내가 똑똑한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올 한 해는 '흐름'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 같다. 어떤 주제가 있고 사람들이 많이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즉 어디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인가, 그리고 그건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것인가 즉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결론은 아직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고 난생처음 보는 논문을 읽는다고 모든 것이 들어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논문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 줄 정도로 친절하지는 않다. 중요하지만 드러내고 이야기하지 않는 뭔가가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뭔가를 더 공부한다고 자연스럽게 그 모든 것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적어도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계기'는 제공해 주는 것은 확실하다. 완전히 생소한 것을 보는 것보다는 조금 더 익숙한 것을 보는 것이 내가 내 생각을 할 여유가 조금이라고 생기니까. 어떻게 보면 우연이고 어떻게 보면 필연이겠지만, 1년 동안 쓴 논문들을 보면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잘 뭉쳐져 있는 것 같다. 올해 같은 경우도 (A)dS distance conjecture를 계속 다른 각도에서 보아 왔는데, 어떻게 보면 대학원생이 논문 쓰듯이 필요한 것을 갖춰 나갔다는 느낌도 받는다. 지난 몇 년 동안 모종의 체계가 있을 때, (Giddings-Kachru-Polchiski의 flux compactifiction이라거나 Kachru-Pearson-Verlinde의 anti brane을 통한 초대칭 깨짐이라거나) 식을 가져다 쓰는 것보다는 최대한 나갈 수 있는 곳까지 내가 계속 쓸 수 있도록 일관성 있게 정리한 다음에 그 과정에서 확인할만한 것을 하나씩 끄집어내는 식으로 논문을 써 왔었고, 이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데, 아마 계속 내가 현재 모르는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확장하는 일은 계속될 것 같다. 현재 상황을 보면, 입자물리를 계속 한 입장에서 납득할 만한 범위, 예를 들어 effective supergravity 안에서 유도되는 것들은 나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우선 그 안에서 계속 일을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계속 드는 생각이, 그 안에서 '논문이 나온다는 이유로' 계속 머물러 있다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계를 만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좋지 않은 상황이라면 한정된 상황에서 20년 넘게 사람들이 다루어 온 주제에 끌려다니다가 아이디어가 다 고갈되어 버려서 누군가가 주제가 제시해 주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못하는 것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생각의 범위나 수준의 한계가 명확하다면, 아이디어를 낸들 그것이 '흐름'을 결정짓는데 기여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명색이 이론물리학자인데 평생 바둑돌 역할만 하다가 사라지는 것은 많이 서운한 일인지라... 좀 더 욕심을 내고 싶고 '괜찮은' (설령 그게 당장 좋은 평가를 받지는 않더라도 결국 맞는 방향으로 가는) 일을 하고 싶다. 이미 교수도 되었고 정년 보장될 정도의 논문도 다 썼는데 대학원생이나 포닥 때처럼 당장 실적을 낼 수 있는 일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겉보기 장식에 욕심 내고 싶지도 않지만 좋은 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남는 것 같다. 사실 교수의 안정적인 직업은 이런 거 하라고 보장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게 가능한 시점에서 연구의 질을 높이는, 혹은 내 이해를 좀 더 깊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는 것은 도의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모쪼록 내년에는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리고 좀 더 많이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만난다면 더 좋겠지만... 그건 아마 욕심이 아닐까... 여하간 할 수 있는 것이라도 충실히 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