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rnf1 2023. 11. 12. 20:41

 몇 주 정도 이해해고 계산한 것들을 살펴보니 논문으로 써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정리 시작. 처음에는 bubble of nothing 쪽에 집중하려고 했었는데 생각보다 넓은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moduli stabilization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들을 하나씩 엮어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올해 3월에 썼던 것과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이 점을 강조하고 추가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으면 같이 부연설명하는 식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다.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해 놓은 것들이 산만하게 널려있기 때문에 일단 정리하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논문을 쓸 때 다소 보수적인 관점을 취하게 되는 것 같다. Swampland program을 따라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그 분야를 끌고나가는 사람들이 다소 급진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은데... Trans-Planckian censorship conjecture 나올 때도 de Sitter가 그 가설에서 이야기할 정도로 짧게 살지 않을 것..이라는 논문을 썼던 적이 있고, AdS distance conjecture가 나올 때 저자들이 이 이야기를 de Sitter에 그대로 적용해서 현재의 우주상수를 여분차원의 크기와 연결 지으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방금 이야기한 3월 논문이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사실 지금 작업 시작한 일도 (진행하다가 이야기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좀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정당화하고 싶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부터 다른 주장을 하게 되다 보니 이들 일에서 파생된 다른 일들과 일정 부분 거리가 생기는 면도 있다. 그게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긴 한데 (논문 인용수 잘 안 올라가는 것 정도?) 내가 가는 길이 어느 정도 실제 자연에 부합하는지는 고민거리이다. 특히나 그런 시각차이가 아직 초끈이론 쪽 지식에 익숙하지 못해서 기술적인 면까지 완전히 이해하는 것에 구멍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원래 생각의 바탕이 현상론이라서 관측이 해 주는 이야기에서 벗어나는 것에 거부감을 가져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초끈이론도 따로 조금씩 공부해 두는 중이다. 어차피 예전에 가끔 공부해 둔 것이 있어 아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계속 논문 작업하면서 알게 되는 것도 있으니 빠르게 하기보다는 천천히 한 1-2년 정도 시간을 두고 하나씩 책들 읽어나가는 식으로 하고 있다. 이래 저래 부족한 건 시간뿐이려나...

 연구를 끌고가는 입장에서 궁금한 것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이다. 어떤 면에서 내가 물리학자로 계속 살아남은 것이,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말하는 이야기가 가지는 빈틈을 역으로 찔러본 덕도 있다. 크게 보면 LHC가 돌아가고 관측우주론이 발전하는 상황에서 data 의존적인 연구가 대세가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게 그 연구를 한다고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누군가가 그것을 단순한 원리로 정리할 필요가 있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실험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오히려 기본 원리를 다시 보자는 생각의 중요성은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규모가 작아지더라도 완전히 쪼그라들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쪽에 인생이라는 판돈을 걸어본 샘이다. 말하자면 'A가 좋다'와 'A만 좋다'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라면 다른 선택지는 고를 필요가 없지만 전자라면 다른 선택지 역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사람들이 후자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실인즉 전자인 경우가 많다. 사는 과정은 워낙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자신의 길을 어떻게든 정당화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다수가 선택하거나 지금까지 어느 정도 재미를 보게 되면 그것을 유일한 길로 생각하거나 그런 것처럼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정확하게 그 이유 때문에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가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인지, 아니면 어떤 방향을 택해야 할 것인지를 계속 의심하고 고민하게 된다.


 이런 고민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는 자신의 역할을 한정짓는 것이다. 실제로 소싯적부터 들어온 소리 중 하나는 '이걸 고민하는 것은 미국 좋은 대학에서나 하는 것'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판을 짜는 일이나 어느 정도 이상의 논쟁적인 고민을 하는 것은 여기서 해 봤자 경쟁력이 없고, 그 논쟁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판이 깔리면 그 위에서 확실히 정의된 문제를 푸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라는 것 같다. 이게 좀 과장해서 나쁘게 말하면 어렸을 때부터 답이 분명한 문제를 맞추는 것만 잘하던 것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내거나 연구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불확실한 상황을 피해 가자는 것으로 들리기는 하는데.. 그래도 같은 박사인데 내가 할 일을 그렇게 스스로 원천 봉쇄하는 것은 그닥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현실적인 퀄리티 차이야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게 생각할 자유가 처음부터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런 제한을 두는 것 역시 자신의 자유이고 그걸로 충분히 살아남았다면 자신에게야 좋은 전략이겠지만 그게 모든 주변사람이 택해야 할 유일한 전략일 수도 없고 그걸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다. 즉 좋은 전략 중 하나일 뿐이지 유일한 전략이라서 모두가 따라갈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쩌면 그게 스스로에게도 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죽이는 일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보면 연구자에게 '합리성'만 강하게 남는 것은 오히려 좋지 못하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주변에서 본 물리학자 중 좋은 일을 한 많은 사람들이 치밀하고 합리적이라기 보다는 몽상가적인 기질을 가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보통은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게 경우에 따라서 합리성만을 동원했을 때 만난 외통수를 깨는 일이 생각보다 많더라.. 는 것이다. 과하게 합리적인 사람들은 두 가지 경향에서 약점을 보이는 것 같다. 하나는 누군가가 잘 짜여진 문제를 제시해 주지 않는 것을 답답해하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주제에 대해 모두 같은 정도로 관심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문제를 만들 정도의 단계가 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그럴싸한 답을 생각해 놓은 경우도 많다는 점이다. 사실 불확실한 상황을 내가 건드는 것 자체가 경우에 따라서는 '기회'일 수도 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내가 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특히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풀 가치가 있는 문제를 만드는 것도 연구 능력인데, 이게 의외로 많이 간과된다. 두 번째는 합리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하려다 보니 문제 자체에 대해 파고들기보다는 유행이나 대가의 시각에 의해 당장 가시적인 뭔가를 보여주는 것을 살짝 건들기만 할 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경우 장기적으로 하나의 큰 주제에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하게 달라붙기 힘들고, 내가 하는 연구 내용에 대해 논문을 쓰기는 했지만 정도 이상의 깊이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그런 심리가 한 번에 대단한 논문을 홀연히 쓰기를 원하는 도박사 기질로 나타나기도 한다. 드라마처럼 천재가 모든 상황을 한 번에 파악하고 모두가 주목받는 답을 논문 하나로 내놓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흔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언젠가 모두를 놀라게 할 논문을 쓸 거야.. 하다가 아무것도 못하거나, 틀린 소리를 할 것을 무서워해서 모든 것이 갖추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리 많이 알아도 완벽하게 알 때까지는 많은 경우 평생이 지나도 모자란 것이 사실인지라... 물론 이건 연구 성향이라서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괜찮은 연구를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그 사람의 개성이다. 좋지 않은 경우라면, 연구 내용 자체보다는 연구의 조직에만 관심을 가지는 경우이다. 이게 어떤 맥락에서 나오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내가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보다 어떤 학술지에 더 잘 싣기 위해 누구와 같이 해야 하고 누구의 인정을 받아야 하며 이 부분을 잘 쓰려면 누구와 같이 일해야 하는가에 더 신경 쓰는 것이다. 물론 논문을 쓸 때 이런 것은 고려해야 할 상황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걸 고민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문제는 '그것 만' 생각하고 논문이 다루는 물리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이 아예 없는 경우이다. 더 안 좋은 경우는 연구 자체에서 손을 놓고 행정이나 정치적인 일에 자신의 합리성을 소모하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몽상가적인 기질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지만 나도 그쪽 취향은 아니다. 당연히 그쪽도 그쪽대로 문제가 있고 그걸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치밀한 합리성이니까.. 결론은, 어느 정도 이상의 지식과 연구 방법론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면 (안그러면 정말 엉터리 같은 소리만 하다 끝날 거라서...) 좋은 연구를 하기 위한 정해진 유일한 방법이 있거나 수준 이상의 이야기를 건들기 위한 그 이상의 아주 특수한 자격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마다 비슷한 것을 다루더라도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보이게 되고, 그런 것들이 연구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그런 것에 대한 선택 혹은 호오는 개인적인 감정이니 어쩔 수 없고 존중해 줘야 하지만 그것'만'을 강요한다면 그건 확실히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갈릴레이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던 것 같다. 학부 시절 과학사 수업 때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당시 갈릴레이의 지위는 '수학자'였는데, 이 지위에 대해 기대되는 역할은 기술적인 계산 정도였고, 우주의 근원이나 근본 법칙을 논하는 일은 '자연철학자'들이 하던 것이었다. 뉴튼 이전 자연의 법칙을 수학으로 기술하는 것이 정립되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이다. 애당초 프린키피아의 원래 제목인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것 자체가 이제부터 자연철학을 수학의 언어로 기술해야 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여하간 갈릴레이는 수학자라는 직위가 주는 굴레에서 벗어나서 자연철학을 논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일을 할 수밖에 없으셨는데, 그건 단순히 연구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적을 많이 만드는 여러 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분이 종교재판을 받게 된 경위 중 이분의 모난 성정+노력 와중에 만들어낸 적들의 역할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뭐 내가 갈릴레이 정도로 똑똑한 것도 아니고 적을 만드는 일을 적극적으로 할 정도로 독한 사람이 아니기는 하지만, 기대되는 역할에서 벗어나고 그런 역할들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은 욕구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게 앞으로의 내 인생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