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끝
계속될 것 같았던 더위가 가시더니, 방학이 끝났다. 어제 막 논문 원고를 얼추 끝까지 써서 몇 번 읽으면서 고쳐야 하는 시점이 되었는데, 그래도 개강 이후까지 집필이 늘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히 이번 논문은 아주 자신 있는 것은 아니라서.. 결과 자체가 너무 사소하거나 그런 건 아닌데 특수한 상황에 너무 초점을 맞춘 듯싶기도 하고, 한편으로 보면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보다는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면서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 느낌도 들어서, arXiv에 뜨는 괜찮은 논문들 몇 개가 아른거리는 일도 있다. 빨리 끝내고 좀 읽어봤으면..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대충 끝낼 수는 없고. 그런데 시점이 좀 절묘해서 수업 같은 학교 일 말고도 여러 해야 할 일들이 한 번에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_-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마음이 급해도 하나씩 처리할 수밖에...
마음 급함을 느끼는 것이 이제는 천성이 되어버린 것 같다. 답답한 것들이 계속 쌓이다 보니 그리 된 것인데, 연구 면에서나 교수 일 면에서나 마음 한 구석에 계속 불안한 요소들이 느껴져서... 재미있어 보이는 주제들이 가끔씩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내가 지금 너무 안이하게 연구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누군가에게 인정 받는 것에 집착하지는 않지만 그저 그런 물리학자로 그쳐서 기계적으로 하던 것만 계속 논문 쓰는 것은 싫고... 큰 흐름을 이야기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누군가의 하청 취급받는 것은 더 싫고... 그래도 정보를 더 얻는다거나 괜찮은 물리를 보는 지혜를 배웠으면 하는 욕심은 계속 생기고... 이왕 가르치는 일 하는 거라면 하는 김에 나도 좀 더 많이 배우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게 힘들어지겠다 싶은 생각도 들고... 하다 보니 이런저런 식으로 '막혀 있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좀 모순적이기까지 한 게, 교수로 자리 잡은 지 벌써 5년 차이고 조금만 있으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건이 얼추 갖추어져 소극적으로 살아도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계속 물리학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게 뭘까 잠깐 생각해 보다가 예저녁에 봤던 삼국지 생각이 났다. 제갈량이 계속 위나라를 공격한 것이 명분적으로는 한의 부흥이라는 이유를 들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강요된 면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관중에서 접근하기 힘든 험한 지형으로 둘러쌓여 있으니 잘 지키기만 하면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기본적인 국력차가 벌어져 있는 상황에서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는 명분까지 사라지면 성장 동력이 떨어지고 결국 먹힐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세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고 기왕 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면 전선을 영역 밖에 두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
많이 배운 사람이라도 식견이 단기적인 합리성에 갇혀버리거나 논리를 이미 심정적으로 정한 답이나 당장의 나의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에만 소비한다면 그 사람의 일은 바보만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계속 보아 왔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좋은지, 당장은 불리한 것 같아도 결국 마지막에 어려움이 없는 길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판단할만한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어떤 정보들은 심지어 왜곡되어 있기도 한다. 그래서 틀린 선택을 하거나 어려움이 빠지는 경우라도 그 당시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 먼 미래까지 생각하더라도 변하지 말아야 할 원칙이 어떤 것인지부터 계속 생각하고 결론마저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사람 살기 바쁜 와중에 그 생각할 여유가 충분히 주어지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사치라서..
지금 생각은 '어느 순간 갑자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고 기본에 충실할 것'이지만 무엇이 기본이고 이걸 어디까지 추구해야 할지, 나름 추구한다고 했는데 그게 오히려 그 기본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식의 복잡한 생각이 계속 든다. 어떨 때는 술은 안마시지만 취한 셈 치고 주절주절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질 정도지만 당연히 아무에게나 그럴 수는 없고..
그리고 어떤 문제든 결국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로 환원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 탓 할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배운 것은, 어느 나이대나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인데... 진지한 사람, 이상을 좇는 사람, 정이 고픈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합리성을 과신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다람들의 집단에 파묻혀 눈을 돌리지 않으려는 사람,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사람, 당장 귀찮은 일을 피하기만 하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관계에 가치를 두느라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지켜야 할지가 불분명해진 사람, 이유를 만들기만 하면 뭐든지 정당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끝까지 책임지지 않을 거면서 던져놓고 나는 옳은 일을 했다고 믿는 사람... 뭐 별별 사람이 다 있지만 이게 어른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어린 사람에게도 존재한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의 스케일이 다를 뿐.... 그래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대인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는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 '나'는 어떤 수를 두어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계속 유지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문제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