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rnf1 2023. 8. 8. 17:59

 날은 정신 나갈 정도로 더운데 '사회생활'은 계속 이어지고 하다 보니 연구하는 시간이 점점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름 결과를 얻기는 했는데 이게 정말 문제가 없는지 슬슬 의심이 드는 중이다. 정신없는 와중에 짬 내서 한 거야 가상하지만 뭔가 문제가 있다면 들인 정성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논문 자체에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게 정말 '좋은' 논문인지는 또 다른 문제라는 게 계속 걸린다. 좋은 논문의 정의가 절대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논문 주제의 흐름에 나름 '사소하지 않은' 역할을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계속 논문을 쓰면서 연구를 하고 있다' 거나 '어쨌건 공부를 했으니까'라는 생각이 핑계가 되어서 중요한 문제를 다루려는 시도 혹은 가능성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가 계속 신경 쓰이는 것이다.

 되돌아 보면 대학생 때 크게 배운 것 중 하나가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진짜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활발하게 연구를 하는 것 같거나 소신이 있어 보이고 그것을 나름대로 충분히 정당화하는 것 같아도, 실제 그 일이 제대로 돌아가는지는 별개이고,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갈 때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접하면서 꽤 속이 쓰렸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비슷한 것을 보고 느끼는 중이다. 정해진 요건을 만족하니까 문제가 없다.. 거나 논리 자체에 흠집이 없으니까 문제가 없다... 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실제로 이루어져야 마땅한 일들이 제대로 되지 않고 그곳에 들어가야 할 힘들이 포장에만 집중되는 것을 많이 접했고, 당장은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무장되었다고 하더라도 거시적인 면에서 보면 중요한 원칙을 크게 위반해서 결국 좋지 않은 결말로 가는 것은 역사책에서만 존재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러고 있지 않은지 하는 생각이 요새 자꾸 불쑥불쑥 들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연구할 때 보면 뭔가 기본적인 것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이게 예측하지 못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나름 생각하고 조금씩 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 많이 아쉽다. 계속 시간을 들여 갖추고 챙겨야 하지만 머리 굴러가는 것도 점점 예전 같지 않고 허락된 시간도 제한적이라서 보다 나은 길이 있는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사실 모든 것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 꼭 흉이 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대단하고 거대한 이론이라도 완벽하지 않고, 어떤 사실에 접근하는 방법은 기존에 만들어진 길 이외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 점을 잘 다스리면 오히려 좀 더 나은 일을 할 여지도 있다. 실제로 중요한 발견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 심지어 똑똑한 사람들마저 시선이 한쪽에 고정되어 있고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그 시선을 이해하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 다른 길을 선택해서 이루어진 것들이 꽤 있다. Gauge invariance가 있는 이론을 양자화할 때 operator formalism 대신 path integral formalism을 쓰는 시도를 했다거나, 약한 상호작용에서 CP violation을 다룰 때 quark 개수를 늘리는 시도를 했다거나... 그런 예들이 존재한다. 내가 교수되기 직전에 어떤 교수님이 덕담 삼아 해주신 이야기 중에 비슷한 것이 있었다. Abdus Salam 선생 이야기였는데,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에 고국이었던 파키스탄에서 일하신 적이 있었다고. 어떻게 보면 물리의 중심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그 시절에 잠시 사람들의 유행에서 벗어나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내공을 다진 시기였다고 한다. 이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닌 것이, 유행에서 벗어나는 것도 위험한 선택이고, 그렇다고 충분한 내공이 쌓인다는 보장도 없었겠지만 어쨌든 하기 나름이기는 하다. 그리고 자리 복도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운이기도 하다. 현명해도 휘말려 들어가 예상했던 불행한 사태를 맞이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능력이 있어도소모되고 이용될 뿐이라 좋은 일을 한들 남의공으로 넘어가 능력을 잘 살릴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실, 어떤 면에서 많은 학자들이 어느 정도는 도박사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유카와 히데키 선생을 평가하면서 나온 말인 '위대한 아마추어'라는 말이 적용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학생 시절에는 이론물리학자라면 차분히 기본부터 쌓고 모든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모든 이론물리학자들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점점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탄탄하게 만들어낸 체계가 풀어내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생각보다 성공적이라는 것이 더 당황하게 만든 것 같다. 물론 그런 시도의 대부분은 엉터리 내지는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쩌다 한방의 효과가 꽤 크다는 게... 생각해 보면 아무도 어떻게 풀지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 바보 같아 보이지만 정곡을 찌르는 해답이 존재하는 것도 막 이상한 일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답을 대놓고 이야기하거나 밀어붙이는 고집 내지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은 어떤 면에서는 모르기 때문에 혹은 사려 깊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휘되는 경우가 있는데,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정말 좋지 않은 자세인 경우가 많지만 외통수에서 쓸 수 있는 나름 유용한 카드가 되기도 한다는 게 많이 아이러니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보니 high risk high return인 시도를 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에 대해 어차피 자연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는데 굳이 이걸 하나하나 이해하기 위해서 수고와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라는 생각을 하기 쉽기도 하고, 그 방향을 만드는 논의에 들어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 (후발주자라거나 변방에 속해 있어서 정보를 접하는 것이 한 단계 늦다거나...)에서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재구축해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 진실에 닿는데 오히려 빠른 경우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야기해 보면 고집스러운데 대체로 하는 이야기는 엉터리 같지만 어쩌다 나오는 아이디어가 상당히 좋은 사람'에 대한 전설(?)은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기도 하다. 물론 이게 중요한 업적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고, 자신의 고유한 시각과 그것을 믿는 고집이 오히려 해가 되는 일도 그만큼 많다. 그래서 같이 일한다고 해서 그로부터 내가 뭔가를 많이 얻는다는 보장도 그렇게 많지 않다. 같이 위험부담이 큰 일에 뛰어들었다가 장래가 많이 불안한 학생이나 포닥 처지에 불리한 상황에 처할 위험도 같이 동반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연구가 가지는 개방성은 그런 위험을 시도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것이 포인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감이 과도한 사람들끼리 경쟁시켜서 알맹이만 빼먹는 시스템이라고 해야 하나... 뒷수습은 각자의 몫이지만(-_-) 성공만 하면 말 그대로 급속한 진전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중요한 발견을 해서 신데렐라가 되는 것은 모두가 힘든 와중에 은연중 가지고 있는 꿈 내지는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실현 가능성과는 별개로. 그리고 뒷수습이 가능한지도 또 별개이고. 


 그래서 연구하다 보면 꽤 많은 순간 복잡한 생각이 한번에 밀려올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일단 뭔가 발견했다는 면에서 보면 재미있고 보람을 느끼고 좋은 평가를 많은 사람들에게 받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생기지만 이게 과연 아무 문제가 없는지, 그리고 아무도 관심이 없을 때 정말 가치가 있는 논문인지.. 하는 어두운 생각도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를 시작한 이래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소신과 아집은 도대체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라는 것. 일단 나는 담이 아주 큰 사람은 아니라서 뭔가를 밀어붙이거나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에서 완전히 신경을 끄는 것, 혹은 이미 있는 지식을 배우는 것을 미루는 일 등을 오래 하는게 많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