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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열면서

dnrnf1 2023. 4. 1. 18:41

2002년 freechal에서 시작했던 홈페이지가 2013년 egloos를 거쳐서 여기로 다시 옮기게 되었다. 지금 대학 신입생들이 태어나기 직전부터 시작한 것이니까 나름 오래 해 온 셈인데, 그래서 그만 두기 좀 아까운 면도 있다. 대충 10여년 주기로 홈페이지를 제공하던 곳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이사를 하게 된 면도 있지만, 각 시점들이 묘하게도 나름 변곡점 같은 느낌을 준다. 2002년이면 내가 대학 신입생 때이고, 2013년은 막 포닥 시작했을 무렵이다. 학위는 2012년 여름에 받았지만 반년 정도 계속 학교에서 일했던 터라 본격적으로 원래 있던 학교를 벗어난 시점이 딱 그 무렵이었다. 그래서 freechal 시절은 학생 일기, egloos 시절은 포닥 일기가 되어 버렸다. 2019년부터 지금 있는 직장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는데, 오늘 승진을 하는 바람에 조교수에서 부교수가 되었다. 하는 일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해서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더 이상 초임교수는 아닌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포닥 시절 동안은 계속 불안감이 짙게 깔린 상태로 살기 마련이다. 그래서 조금씩 연구든 생각하고 있는 것이든 대나무숲 삼아서 (물론 공개적인 곳이니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정리를 하고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일단 털어놓으니 안정이 되고, 조금이나마 객관적이 되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말하자면 가상의 상담 상대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수가 된 지금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이냐... 고 물으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보통 연구직을 염두에 두는 학생들과 상담할 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겪는 불확실성이나 힘든 인간 관계들을 이야기하기 마련이지만 요새는 하나가 더 늘어난 것 같다. "교수가 된 다음에도 처음 물리를 좋아했을 때 생각했던 '그' 물리학자가 될 자신이 있는지?" 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직접 뛰어들기 전 까지는 오해나 환상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꿈꾸던 그 모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순수하게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스스로 납득하도록 이해하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존재하는 반면, 그걸 제대로 실천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것 같다. 내가 들었던 말 하나를 빌리자면 '물리학자가 택할 수 있는 직업은 교수 정도지만 모든 물리 관련 교수들이 물리학자는 아닌' 것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교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뭔가를 하고 대가를 받는 직업이고 정년이든 임기든 어떤 공식적인 기한이 있는 것이지만, 물리학자의 기한은 본인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다. 교수가 된 다음날 (혹은 이미 그 전부터) 당장 버릴 수도 있고, 죽는 순간까지 물리학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 내가 물리학자를 '그만 두었는지'는 스스로도 잘 모를 수도 있다.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하고 고민하는 것을 그만 둔다면 아무리 '좋은 논문'을 쓴다고 해도 실상은 빈껍데기일 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빈껍데기인 상태로 그럴듯한 논문을 쓰는 (정확히는 이름을 올리는 것이겠지만) 것이 가능하다. 



 포닥과 교수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교수 자체가 학자로 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직업이기 때문에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할 상황이 많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칼이나 총을 잘 쓰는 용감한 무사가 장수가 될 수 있고, 그 재능이 장수가 될 수 있는데 도움이 되어 줄 수는 있지만 가장 중요한 장수의 덕목은 단순히 싸움을 잘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상황을 보고 어떻게 움직어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갖추어진 상태에서 가지는 좋은 싸움 실력은 자신을 좀 더 좋은 장수로 만들어 줄 수 있지만 반대로 장수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가지는 싸움 실력은 오히려 자신과 주변 사람을 망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자신의 싸움 실력을 과신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어버리면, 장수로서 갖춰야 할 능력을 키우는 것을 스스로 억제하는 셈이니 스스로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까지 망치는 독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사실 교수가 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에, 교수인 사람은 대체로 뭔가 비범한 것을 적어도 하나씩 가지기 마련이다. 좋은 계산 능력, 끈기, 사람들과 잘 대화하고 그 속에서 적절한 것을 잡아내는 능력, 순간적인 머리 회전, 좋은 기억력 등등 계속 살아남는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기는 하다. 물론 운이라는 요소도 중요해서 끝까지 못버틴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기도 힘들기도 하다. 말하자면 사람마다 잘 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지만,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이건 말 그대로 천시와 지리와 인화의 문제, 즉 내가 연구하는 그 시점, 장소, 그리고 같이 이야기하게 되는 사람들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잘 해 나갈 수 있는 조건과 맞는가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모종의 자리에 앉게 되고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때 내가 가져야 하는 덕목은 지금까지과는 다소 다른 방향을 가진다. 스스로 보고 판단하며 그것을 가지고 끝까지 끌고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나는 행복할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은 불행해 질 수 있다. 모든 것을 자신이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이가 들어 많은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하고 판단 능력이 떨어지고 하다 보면, 편하고 쉬운 것을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그동안 배운 것은 더 이상 내가 해야 마땅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근거' 내지는 '정당성'을 생각해 내는 것에 이용될 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수가 되었다고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전쟁은 어떤 자리를 얻거나 하는 식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은 사라지고 나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과정만 온전히 남아버리는 것 같다. 



 교수로 일하면서 한구석에 깔려 있는 공포감은 점점 나 이외에는 아무도 내가 계속 연구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이건 의외로 현실적인 문제이다. 당장 연구를 그만 둔다고 해도 사실 뭐라고 할 사람은 없고 오히려 반겨질 수도 있다. 아마 학생들에게 수업하는 과정에서 그게 막 티가 나거나 수업의 질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물리학자 하나는 사라지게 된다. 그 순간에도 계속 어디선가 사람들은 뭔가를 알아가기 위해서 서툴게나마 나가고 있고 이게 여러 해가 쌓이면 나는 잠시 한눈을 팔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뒤쳐지게 된다. 그래봤자 내가 죽을 때까지 자연의 진실을 알 수는 없으니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애시당초 물리학자를 시작할 때부터 내가 모든 걸 밝혀지기를 바란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평생 해도 세상의 진리를 알 수 없다'라는 동일한 문장이 어떤 시점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고 조금이나마 진실에 다가가는 것에 기여하면 좋을 것이다. 오히려 별로 밝혀진 것이 없으면 내가 뭔가 할 기회가 더 있는 것이다'라는 물리학자를 해야 되는 이유가 되었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그러니까 내가 그만 두어도 아무 문제 없음'의 이유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그 사람을 보는 옛날의 '바로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그리고 그 결론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자리를 내가 차지해야 하는가?  물론 여기에 대한 답은 '당연히' 준비되어 있다. 다른 사람이 내 자리에 대신 앉아 있더라고 해도 나보다 못하거나 같은 식으로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내가 지금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해 준다는 것은 좀 그렇다.



 생각해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언뜻 보면 가장 중요해 보이고 그 안에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미묘한 균형이 간신히 유지되는 것과 같고 깊이 있게 들어가는 것은 더 힘들다. 반면 물리는 당연히 어렵고 어떨 때는 아무리 건드려도 제대로 된 것 하나 내 줄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항상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품고 있기 때문에 계속 열려 있는 것 같아 오히려 더 편한 면이 있다.





 물리로 돌아오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 연구를 관통하는 화두는 'naturalness(자연스러움)가 양자역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입자물리의 관점에서 보면 Higgs라는 표준모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입자가 왜 vacuum expectation value (VEV)를 특정 scale에 가져야 하는지를 묻게 되는데, 이건 Higgs potential의 근원에 대한 질문의 일부이고, 80년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naturalness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자면 TeV scale 이하에서 Higgs potential을 만들어 주는 어떤 물리현상 ('new physics')이 존재해야 하지만 이게 발견되지 않다보니 정말 naturalness가 추구해야 할 방향인지에 대해 회의가 강하게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조금 눈을 돌려 보면 비슷한 문제들이 여기 저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현재 우주가 가속팽창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우주상수(cosmological constant)는 매우 작다. 그리고 그 값은 Higgs의 질량과 마찬가지로 우주상수에 기여하는 여러 양자역학적 효과들이 절묘하게 작은 값으로 맞춰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많은 요소들이 합쳐짐에도 불구하고 결과값이 그렇게 작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를 물을 수 있고, 이건 Higgs의 naturalness과 상당히 비슷한 문제이다. 한편으로 우주 초기에 급팽창 (inflation)이 있었다고 한다면 현재 우주의 균일성 (homogeneity)을 잘 설명할 수 있고, 어떻게 초기의 양자 요동이 고전역학적인 요동으로 변형되어 현재의 은하단과 같은 구조를 만들어 줄 수 있는지도 이야기해 줄 수 있는데, 그 급팽창 시기에 어떻게 우주 상수가 충분한 시간 동안 평평할 수 있는지도 비슷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들 우주론적인 문제에는 '중력'이 개입한다. 그래서 내가 중력의 양자역학적인 성질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naturalness에 대한 이야기, 특히 정당화해 줄, 혹은 폐기해야 할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가 현재 내 연구의 기본적인 밑바탕이 된다. 한 4-5년 가까이 swampland program 쪽을 기웃거린 것도 그 밑바닥에 깔린 생각 자체가 양자중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naturalness의 기준이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일단 우주론과 관련된 문제에서 시작해서 이것 저것 생각해 보고 있는것이 지금 내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라면 현 시점에서 이미 입자물리와 초끈 혹은 양자중력 쪽은 서로 대화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많이 갈라진 상태라는 점이다. 그래서 입자물리로 훈련받은 입장에서 보면 거의 대학원생이나 다름 없이 하나씩 공부해 가야 하는 상황이다. 처음에는 현상적인 것과 연결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파고 들어갈 수록 깨달은 것이, '어중간한 것 만큼 건질게 없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일단 누가 알아주는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교수까지 되어서 그거 신경 쓰기에는 좀 많이 바쁘다... 맞는 소리 했는데 안알아주면 그 사람이 멍청한거지...)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생각을 낼 수 있는 단계가 되려면 좀 더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한 2-3년 전부터는 계속 이것 저것 공부해 보고 조잡하더라도 어떻게든 논문까지 써 보자...는 식으로 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예전에 공부했다가 잊어버린 것, 아직 잘 모르는 것들을 계속 보고 있어서 시간이 많이 필요한 상태이다. 이제 코로나도 점점 끝나가니까 여기 저기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지금 어떤 식으로 가고 있는지를 직접 들을 수 있긴 할 터인데, 그 과정에서 알아야 할 것들을 모아서 또 공부하고 논문화 까지 해 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렇게 보면 정말 시간이라는 것이 많이 아쉬운 존재라는 것을 계속 깨닫게 된다. 



 진짜 '충분한 시간'이 많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