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
직업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그럴듯한 말 뒷면에 숨겨져 있는 함정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요새 '인정받는다' 혹은 '알아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일들이 자꾸 생겨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 '인정받게' 된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인정받는가.. 일 것이다. 내가 뭔가 중요한 일을 했다는 것을 여러 사람이 알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존경 비스무리한 것을 받는다... 정도겠지만, 사실 그 일이 진짜 중요한지 판단하는 것부터 가끔 애매해질 경우가 있다. 당장은 그저 그런 일인 줄 알았는데 수십 년 지나서 심지어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보니 그게 중요한 것이었더라.. 일 수도 있고, 당시에는 시의 적절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사실 의미 없는 일들을 열심히 했을 뿐일 수도 있다. 아니면 실제로는 인정받는 것에 걸맞은 능력이나 깊이를 갖추지 못했는데 누군가를 잘 이용해서 그런 것처럼 보이고 있을 수도 있고, 내가 하는 노력을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실력을 기르는 것에 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것에 소비하고 있을 수도 있다. 실제 하지 않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공상적으로 원하는, 혹은 대단하다고 생각할법한 말을 해 준다거나.. 혹은 모종의 점수(수치)화된 뭔가를 만족했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보증되었다고 믿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고, 자신이 앉아 있는 지위가 모든 것을 보장해 준다고 믿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대단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이 어떨 때는 참 허무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을 때가 많다. 사실 내가 맞는 말을 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 잘못한 지분도 꽤 큰데 내가 괜히 미안해하거나 만족시키려고 뭔가를 무리해서 하는 것도 좀 그렇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내 능력에 더 투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좀 더 냉정히 말하면 내가 뭔가를 한다고 변화가 생기지 않을 확률이 꽤 큰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굳이 평가받는 것에 집착해서 소싯적 시험에서 등수 따듯이 내가 이 기준을 만족시켰으니 이 정도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성장이 더딘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런데 반대쪽 극한, 즉 고립되어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이냐...면 글쎄... 물론 자신의 판단에는 대체적으로 그것을 정당화해 주는 자신의 논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 박사 이상 되어 어느 정도 배운 사람에게는 그렇긴 한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틀릴 가능성만큼 내가 틀릴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새로운 방향을 발견해서 가고 있는데 나만 나에게 익숙한 것, 혹은 쉬운 것만을 찾다가 완전히 잘못된 길을 고수하면서 그것을 소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하니까.. 같은 말로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한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현명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본능은 자연스럽게 쉬운 것, 익숙한 것으로 기울 가능성이 크다 보니 그것만 찾아 집착한다면 실제로는 정작 의미 없는 것을 열심히 하고 있을 수 있다. 혹은 확실히 답이 있어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찾다 보면 (그것도 누군가가 채점해서 맞다는 것을 확인해 줌으로써 인정해 줄 것이라는 기대의 결과겠지만..) 누군가가 문제를 제대로 정의해 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왜 나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거냐며 남 탓만 할 수도 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고 직접 물이 나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아니면 잘 정의된 문제의 끝을 따라다니며 틀리지 않는 이야기에만 집착을 할 수도 있다. 물론 틀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중요하다. 프론티어를 개척한다고 아무 말이나 남발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방향을 더 흐리게 만들 수도 있고, 단순히 내가 앞서나가고 있다는 자기 만족만을 줄 뿐인 무책임한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떨 때는 근거가 좀 부족해도 뭔가 밀고 나갈 일도 종종 생긴다. 남발하지 않으면서 꼭 해야 할 때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게 쉬울 리가...
결국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게임이다보니 무엇이 옳은지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아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다.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고, 그것이 틀릴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부담은 계속 안고 있어야 한다. 그게 심리적으로 큰 압박이 되다 보면 그 부담을 피하거나 잊으려고 하는 시도를 하기 마련인데, 대체로 판단을 포기하고 하나의 길만을 계속 쫒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때그때 언제 무엇을 고집할지, 아니면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항상 어렵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꼭 멋있는 혹은 가치 있는 일이냐면...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가장 좋지 않은 것은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피하면서 그것을 본질에서 벗어나지만 그럴싸한 이유로 포장해 버리는 것이다. 나는 남에게 항상 친절하고 배려하며 합리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기 때문에.. 라거나 이건 '도덕적인' 일이니까... 난 내가 중요하고 이건 내가 행복한 길이니까... 같은 것들이 대체적으로 잘 동원된다.
연구 하는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방향을 정하고 그것에 대해 엄격함을 추구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 방향을 유일한, 혹은 최고의 방향이라고 너무 쉽게 단정 짓고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려 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내가 독점하고 모든 것을 평가할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 기준이 정말 절대적인지 스스로 의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여러 역설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다. 말하자면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믿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인 행동이 되고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것 자체가 실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내가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모르지만 그것도 아닌, 남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조금 더 먼저 알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어떤 지도자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 분야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팔아 스스로를 높이는 호가호위일 수 있다. 그런 경향이 생기면 반작용으로 그 지식이 추구하는 것과 반대 방향을 추구하는 집단의 결집을 낳기 마련이다. 심지어 그 지식 자체가 필요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경향을 낳기도 한다. 언뜻 보면 그것을 꽤 친절한 것으로 보인다. 엄격함은 상당히 자주 사람의 마음을 피곤하게 만들고 상처를 주기 때문인데, 몰라도 된다, 혹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우리는 그렇게까지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쪽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옳은 자세냐... 그쪽에 들어가서 그 속에 어울려서 엄격한 쪽의 지식을 잊어버린다고 해서 그게 정말 세상에 없는 것이며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이냐... 고 물으면 그 역시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 무지를 정당화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결과를 줄 수도 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 없다고 여기고 고립시키지만, 그게 다른 쪽을 정말 없애는 방법은 아니니까.. 결국 그런 대립은 정치가 되어서 실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 내지는 다른 쪽도 선택할 수 있다는 유연성을 잃게 만들고 불필요하게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결국은 가야 할 방향을 찾는데 방해가 될 수 있으니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내가 방해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그런 난장판에서 한걸음 벗어나는 것이 어떨 때는 편한데, 그런 편함이 나를 녹슬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하는 두려움도 계속 생긴다. 혹시 내가 뭔가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버리고 있는데 싸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혹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를 존중해 주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그걸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쉬울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고, 내가 당장 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결국 중요하다고 밝혀질 것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어떤 것인지 알아채는 것부터 여러 가지로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