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7
물리에 푹 절여진 입장에서 수학책을 보면 뭔가 빙빙 돌려 말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물론 이건 수학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잘못(이라고 해야 하나..) 이긴 한데... 수학 입장에서는 애매한 점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 결과겠지만, 정작 나는 수학을 '소비'하는 것에 일단 관심이 있다 보니 당장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거나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 바로 옮겨지지 않으면 길을 금방 잃을까 봐 불안해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냥 holomorphic function (사실 holomorphic이라는 것도 수학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일단 초대칭 공부를 한 입장에서는 익숙하니까.. )이라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는 반면 linear bundle이라고 하면 처음에는 잠깐...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적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local 하게 정의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해야 하니까..) 몇 년 전만 해도 논문에서 그런 단어를 보면 뭔가 모를 혼란함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럭저럭 익숙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완전히 그림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Sheaf를 이용해서 cohomology를 만들고, 그것을 exterior derivative를 가지고 만든 de Rham cohomology와 연결하는 부분이라거나... 논문에서 볼 때마다 '일단 받아들이고'를 시전 하니까 계속 껄끄러웠는데, 요새 증명을 보게 되면서 일단 그런 불안감은 조금 줄어든 상태이다. 되돌아 보면 어떤 것이든 익숙해지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수학은 더더욱 그러하지만, 수학 자체가 우선적인 관심사가 아닌 상태에서 모든 시간을 쏟을 수 없다 보니 깊이 들어가기보다는 어떻게든 이미 알고 있는 그림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게 되고, 그 결과 제대로 소화를 못 시켜 필요 없는 고생까지 덤터기로 하는 것 같다. 수학책을 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수학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익숙해지려는 것에 더 방점이 생기는 느낌이려나... 어떤 것이든 시간을 충분히 들이지 않고 보자마자 바로 삼키는 것은 적어도 내 능력으로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가장 이상적이라면 물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가지고 수학적인 상황을 상상해 가면서 맞춰나가는 것이고, 그렇게 되려고 조금씩 노력은 하고 있긴 한데, 사실 많은 경우는 수학과 물리가 혼재된 것을 접하는 상황이 이해의 다음 단계라기보다는 이해 과정 자체인지라... 아마 지금 계속 수학을 보고 있는 것이 완벽한 이해를 주지는 않을 것 같지만, 적어도 내년에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논문 수가 늘어나게 만들기는 할 것 같다.
조금 엄격하게 보면, 많은 것이 상대적이기는 하다. 전공 분야에 따라서는 내가 알고 있는 물리도 상당히 수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반대로 수학 훈련이 덜 된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에, 경로와 양과는 상관없이 일단 알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해서 다음의 뭔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지 그렇다고 내가 아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하는 상식이고 내가 모르는 것은 꼭 알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치사한(?) 생각을 하지 않을 뿐이다. 뭔가를 안다는 것 마저도 정도와 깊이가 다 다르기에 단어 몇 개 알고 증명 좀 따라간다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위험하고. 지금 당장 안다고 생각해도 조금 지나서 그걸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할 때 혼란에 빠진다면 아주 잘 알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그 혼란함을 해결하는 것이 예전에 보았던 것을 이해하는 새로운 과정이 된다. 물론 나중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보니까 갓 배울 당시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것을 잔뜩 생각할 수 있게 되는 일도 있다. (수학뿐만 아니라 물리에도 이런 일은 적용된다. 수업 준비하다가 같은 경험을 꽤 하는 편인지라...)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안다고 해도 그걸 이용해서 뭔가를 하는 것은 또 다른 어려운 일이라는 점인데... 부디 내년에는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지금까지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새로운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 내 오리지널 아이디어가 아니더라도 이미 있는 것 중에서 신경 써서 볼 것을 선택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다. 아이디어라는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일을 비교하면서 생각의 방향을 구축해 나갈 때 하나씩 생기는 것인데.. 매일 많은 논문이 새로 생겨나는 상황에서 적절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거나 뭔가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고르는 것은 중요하지만 생각보다 어렵다. 방향이 맞아도 내가 아직 준비되지 않아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하면 속이 좀 많이 쓰리기도 하고.. 이것도 계속 시간을 들여가면서 쌓아가야 하는 것이기는 하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주목하지 않을 때 중요성을 인지하고 내 방식대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의 문제도 생각함직 하다. 개인적인 경험 중 가장 씁쓸했던 것은, 처음 내가 이야기할 때에는 귀담아듣지 않다가 유명한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하니 그때서야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내가 이야기했던 그 시점에서 같이 공부하고 알아갔으면 서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였을 수도 있는데, 듣는 사람이 시야가 넓지 못하면 그들은 대체로 권위나 유행에 의지하기 마련이라서 '권위와 유행이 생기기 전의' 시점에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주제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의 사람이 가지는 명성이나 자리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게 어떤 면에서는 실패 없이 안정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신의 물리 능력을 늘려주지는 못하기 마련이다. 유명한 사람이 이야기를 한 시점에는 이미 그 사람은 저 멀리 가 있고 경쟁자도 많아지기 때문에 내가 뭔가 좋은 일을 할 기회는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다. 그렇게 해서 관련된 일에 손을 대지 못한 채로 지나가거나 지엽적인 일만 하고 더 그 뒤에 있는 흐름과 생각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 반복되면 좋은 물리 이야기라도 그 사람에게는 장식품에 그치게 된다. 스스로를 이런 좋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 혹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 만족하는, 즉 좋은 일을 한 사람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그대로 이야기하면 확실히 보장된 이야기만을 하는 샘이고 내가 틀린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똑똑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자신의 물리 내공을 낮추는 아주 좋은 함정이라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옆에 노벨상 내지는 그에 버금가는 대가가 있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내 시점으로 제대로 받아들이고 중요한 이야기를 생각해 낼 수 없다면 단순히 같은 업종을 가진다는 것 혹은 그 옆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무슨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거나 제대로 논문을 읽어보면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행사에서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로 만족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어버리기 마련인지라.. 그래서 과한 대외 활동은 오히려 문제가 되기도 한다. 어느 시점에서는 진지하게 스스로 이해하도록 읽고 계산해 보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다면 내용 소화도 못한 채 학원만 많이 다니는 대입 수험생과 같은 상황이다. 학회나 스쿨이 많아진 것의 부작용이 그런 것인데, 더 안 좋은 경우로 학생도 아닌데 내가 발표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고 나머지는 신경도 안 쓴 채 컴퓨터 모니터만 들여다보는 것을 상당히 많이 보게 된다. 학회에서 발표까지 하지만 정작 학회의 내용에 지식도 관심도 없는 일도 있고. 학회가 연구와 상관없는 사교 모임 내지는 세력 과시 행사가 된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일단 나는 내가 알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조금만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항상 모든 것이 성공적이지는 않고 당장 가시적인 결과를 주지는 못하더라도 낯선 곳을 가 보는 것은 결국 손해가 아니기는 한데, 그래도 좀 더 생산성이 생기면 더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