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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스 센터 1주차

dnrnf1 2024. 8. 10. 08:17

스토니 브룩 사이먼스 센터에서의 2주짜리 일정도 이제 반이 지나갔다. 마침 허리케인이 덮치지는 않고 아래를 살짝 지나가준 덕에 더위가 심하지 않아 피서도 겸하고 있는 것 같다. 이 학회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파 선생의 공개 랩미팅.. 정도일 텐데, swampland program 쪽에 포커스가 매우 강하게 맞춰진 편이다. 내 입장에서는 이게 오히려 좋은 점이기는 하다. 일단 요새 연구들이 이쪽을 계속 건드리게 되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식으로 현상론 혹은 우주론에의 응용에 그치는 것은 그쪽에서 진짜 배워야 할 것을 얻지 못하고 겉핥기만 하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계속 있어왔고, 그런 면에서 본격적인 양자 중력 혹은 초끈 이론 쪽으로 어느 정도까지 확장해야 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3-4월에 걸쳐서 벼락치기로 초끈 이론 한번 훑은 것도 탐색을 위한 준비 중 하나였고... 당연히 나도 생 초보 연구자는 아니기 때문에 책 한번 본다고 모든 논문이 이해가 갈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은 아니긴 하지만, (연구 경험도 쌓여야 하고, 무엇보다 같은 내용을 다루더라도 이해하는 방식이나 추구하는 방향은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애시당초 이론도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크건 작건 계속 변화가 있다) 그래도 아예 모르고 보거나 기본적인 것을 이해하거나 유도하는데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어 정작 중요한 부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미리 정리할 건 정리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어쨌건 그런 작업들이 의미가 없지는 않았는지, 하나도 못알아먹는 참사는 다행히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희망적인 면이 보였는데, 이전에 이런 방향으로 연구를 끌고 갈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었던 것들이 학회에서 꽤 진지하게 이야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Swampland program이 양자중력을 개입시켜서 naturalness의 기준을 다시 정하자는 면이 있고, 그런 면에서 초끈 excitation tower들을 모두 고려하면 처음부터 10차원 초대칭이 왕창 깨진 (즉 초대칭이 초끈 mass scale 정도에서 깨진) 끈이론을 만들더라도 UV divergence가 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제안 (90년대 중반 K. Dienes 선생이 진지하게 이야기했었다) 이 나름 조명을 받는 것 같았다. 실제로 S. Abel과 K. Dienes 선생이 최근 Higgs 질량이 초끈의 modular invariance 등에 의해 어떤 형태를 가질 것인지 이야기하기도 해서, 이걸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지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주 초반부 발표 내용들은 그런 non-supersymmetric string theory를 구현하는 모형들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다. (사실 내가 오기 전 저번 주 학회 발표 중 non-supersymmetric string theory를 다룬 것도 있었다) 그것 이외에도 tadpole conjecture 같이 학회 오기 전 나중에 읽으려고 뽑아놓았던 논문들이 이번에 이야기되기도 했고... 그렇게 보면 일단 충분한 동기가 있고 시간만 적절히 투자된다면 조금 더 초끈 이론 쪽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 는 생각도 들고 있다.  조금 우려되는 점이라면 연구의 다른 축에 해당하는 '중력의 열역학을 가지고 우주를 기술하기'에 관한 생각을 할 여유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인데... 이것도 관심 가는 논문 뽑아놓고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_-ㅋ 말다세나 선생 강의 듣고 좀 군침이 더 가는 중이기는 한데... 사실, 한번 논문을 썼다고 해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거나 관련 논문들의 흐름을 챙기지 않으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따라잡기 힘든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 좀 걱정된다. 이럴 때 예전의 논문 경험이 오히려 좋지 않게 작용해서, 예전의 이해를 전부로 착각하고 뒤떨어진 생각을 하는 경우를 워낙 많이 보아와서리... 사실 이건 엄청난 대가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 도착할 무렵 리정다오와 뵤르켄 선생께서 돌아가셨는데, 리정다오 선생을 직접 겪어보신 분에게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조금만 손을 놓아도 금방 따라가기 힘든 상태가 되는 것은 그분도 마찬가지로 고민했던 것이라고... (아무래도 입자물리와 통계물리를 왔다 갔다 하셨기 때문에 그런 면을 더 강하게 느끼셨을지도...)


 이번 학회가 괜찮은 점 중 하나는 하루에 발표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예 대놓고 발표는 에피타이저에요... 라고 하는데, 남는 시간 동안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관련 논문들 챙겨보는 것이 더 핵심이 아닐까 싶다. 상대적으로 덜 지루한 건 덤이고.. 1주일에 한 번은 해변으로 가서 발표를 듣는데, 화창한 날씨가 아니라서 좀 으슬으슬 하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동을 노란색 스쿨버스로 한 것이 꽤 독특한 경험이었고.. 자연 앞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물리학자라도 학생이긴 하지만...-_-ㅋ 중간중간 있었던 이벤트들도 나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재즈 공연 같은 경우는 난생처음 본 것이기도 하지만 한 시간 동안 음악만 듣고 있었던 것은 진짜 오랜만이었고.. 올해 봄에 사이먼스 선생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잠시 추모특집이 있어서, 뱅킷 때는 부인분께서 오시기도 했다. 


 다음주까지 이어지니 아마도 또 다른 것들을 많이 보겠지만...  전문가가 아닌 경계인의 입장에서 느끼게 된 것이라면 당장 모든 것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크게 부담 느낄 필요는 없다는 점인 것 같다. 물론 아무 생각도 없으면 안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학회에서 다루는 내용이 양자 중력 혹은 초끈 이론의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당장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내가 아주 무지한 것은 아니라는 것. 어차피 누가 나에게 직접 연구 문제를 던져주는 것이 아닌 이상, 기본적인 동기와 목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다음 내가 이쪽을 더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다. 일단 들어가게 되면 금방 이해되지 않는 세부적인 면은 (충실하게 대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채워지기 마련이다. 연구를 하는 사람이 꽤 자주 밟는 함정 중 하나가, 상당히 잘 조직된 학맥이나 대가의 위상에 너무 압도되어서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에 과하게 압박을 받고, 한번 어느 방향으로 훈련이 되면 그게 도그마가 되어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의지를 잃거나 (사이비과학도 아닌데)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방향에 과민할 정도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그러니까 이건 물리가 아니야.. 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관점이 세상을 보는 유일한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이라는 오만이 생기는 셈인데, 사실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하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애시당초 무엇이 물리라야 하는지 정해져 있는 것은 없고, 물리학자가 물리만 연구하라는 법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19세기 맥스웰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행성 운동을 탐구하고 그 안의 법칙을 찾는 역학과 기술적인 면을 앞세워 발전한 전자기학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오죽하면 현대적 의미의 '물리학'이 정립된 다음 나온 첫 번째 대가가 아인슈타인이다.. 는 말까지 나왔을까.. 결국 연구의 방향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다면 가 보는 것이 맞는 것이다. 앞에 어떤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너무 쉽게 단정 짓는 것은 상당히 아까운 일이니까.. 예를 들어, 이론물리를 연구하다가 수학적인 것이 나와서 '여기서부터는 수학의 영역이니 물리학자인 나는 더 나가지 않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수학적인 것도 계속 파다 보면 그 속에서 물리의 어떤 문제를 풀 수 있을지 모르는데.. 반대로 계속 실험을 하다가 '여기서부터는 공학의 영역이니 물리학자인 나는 더 나가지 않겠다'라고 하면 그것도 바보 같은 일일 것이다. 충분한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관념적으로 굳혀버린 물리에 충실하다가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 (자연의 신비를 발견한다거나...)을 자신이 보기에 이단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이 잡아내는 것을 보고 무너지는 경우는 역사 속에 심심치 않게 있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가끔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해 보기도 하고, '코가 가리키는 대로' 가 보는 것이 선입관에 갇혀서 미리 재는 것보다 좋을 때가 있다는 것.


 이번 학회가 한국인들이 꽤 많이 참석한 것도 다소 인상적이었다. 원래부터 알던 분은 두 분 밖에 없었지만, 새로운 만남이라는 것도 나름 좋은 경험인 것 같다. 알던 분 중 아마 앞으로 뵙기 힘들게 될 분이 계셨는데, 이번에 이야기를 좀 할 일이 있었다. 처음에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하셔서 영어로 말 걸고 하셨던 분이셨다...만,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비행기 타면 의외로 자주 승무원분들이 나를 외국인으로 착각하고 식사 때 영어로 말 거는 일을 겪는다.. 이번에 올 때도 그랬는데... 내가 '한국인'처럼 안 생긴 건가..-_-) 이 분에 대해 내가 개인적으로 감사하고 있는 것은 사소할지 모르겠지만 마주칠 때마다 첫마디가 '요새 무슨 연구를 하는지?'라고 물어보신 것이었다. 이게 당연해 보이는데 의외로 겪기 힘든 것이라서... 나도 배워서 종종 활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어디 교수 혹은 누구 제자 그런 것이 아니라 딱 물리학자 자체로 대해 주시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당히 좋았달까... 여하간 적어도 물리 연구에 있어서는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막 틀린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안심이 된 면도 있었다.